1979년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제9사단장이었던 노태우 등 '하나회'(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했던 군대 내 사조직)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 이들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그해 11월 중순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뒤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했다.
결국 12월 12일 저녁, 서울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제33헌병대 병력 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해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해 제압한 뒤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로 연행했다. 당시 진압군 병력 출동을 추진했던 육군수뇌부(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이건영 3군사령관, 윤석민 참모차장, 문홍구 합참본부장)는 모두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됐다.
1979년 12월 12일 당시 19살이던 김성수 감독은 겨울밤 서울 한남동에서 20분이 넘도록 총성을 들었다. 두려움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떨면서도 김 감독은 누가 무슨 이유로 총격을 벌였는지, 또 누구와 싸우는지 궁금했다. 그날 이후로도 계속 의문을 지닌 채 살았다. 훗날 이른바 '12·12 군사반란'의 내막이 알려진 후 의혹은 해소됐지만 대신 큰 충격이 자리 잡았다.
단 하룻밤 만에 쿠데타로 권력 찬탈이 성공을 거뒀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의혹은 충격으로, 충격은 다시 의문으로 바뀌었다. 영화 개봉 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김 감독을 만나 그의 의문과 충격, 의혹이 어떻게 '서울의 봄'으로 정리됐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총성이 들렸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씨가 권력을 잡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날, 김성수 감독은 19살이었다. 그는 한남동에서 이태원으로 가는 길에 장갑차를 목격했고, 이상하고 궁금해서 쫓아갔지만 군인들이 길을 막았다. 김 감독은 "총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오들오들 떨며 총소리를 듣던 기억이 있다"며 "집으로 가야 하는데도 너무 궁금해서 못 가겠더라"고 그날을 회상했다.
그는 "동네에서 총소리를 듣는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니 그 총성이 너무 기억이 잘 난다"고 덧붙였다.
그런 김 감독에게 '서울의 봄'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로부터 받은 시나리오는 그날의 정황을 기가 막히게 압축한 '사실의 축소판'이었다. 처음에는 전두환씨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 승리의 기록을 굳이 영화로 만들어 줄 필요가 있을까 싶어 고사했다. 그러나 그날의 총성만큼이나 '서울의 봄' 시나리오는 김 감독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난 왜 이 이야기에 집착하지?' 이런 의심이 있었어요. '난 왜 이 시나리오를 연출하지 않는다고 했지?' '나는 이 이야기의 어떤 것에 매료되고 어떤 걸 영화로 연출하고 싶지?' 그런 생각을 계속했죠. 오랜 자문자답 끝에 (하이브미디어코프) 김원국 대표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내가 해석한 이야기를 넣고 싶고, 시나리오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때부터 역사를 공부하고, 시나리오를 고치기로 방향을 잡았죠."
그렇게 모두에게 알려진 사람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틈, 그 맥락 속에 숨은 인간군상 등을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매워 넣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낀 대로 어처구니없이 권력과 역사를 뒤바꾼 9시간을 해석하고 싶었다. 그것이 신군부 세력의 승리로 남지 않길 바랐다. 그렇기에 전두광(황정민)의 대척점에 선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게 바로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이다.
김 감독은 "역사 속 인물이지만 그대로 쓰면 안 되고 끝까지 그들과 맞서면서 마지막에 가서 그들이 승리하는 순간에도 '넌 승리한 게 아니야' '넌 인간도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절대 그 인물들(신군부 세력)이 미화되거나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전두광은 마침내 웃는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을 알수록 의문은 짙어졌다. 그리고 그날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후로 김 감독은 절대 승리의 기록, 자축의 분위기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거듭 질문을 던졌다.
그는 "그 당시 군인들에게 물어보면 (신군부 세력은) 엘리트에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그런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 한 일이 그런 일들인가? 멋진 군인인데 그런 일을 저지르고 이후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들었어? 절대 납득이 안 됐다"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 끝에 그는 그날을 만든 인간군상의 모습을 마치 블랙코미디처럼 비췄다. 김 감독은 "어쩌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할 수 없기에 입을 다물고 있거나, 또는 너무 많은 떡고물을 받았기에 입을 열 수 없었거나, 아니면 그들끼리 인성의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을까"라며 "그들이 근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해도 관객들은 '저랬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 끝에 다다른 게 바로 영화 마지막, 전두광의 화장실 신이다. 극 중 전두광이 군사반란을 일으키며 신군부 세력에게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란에 성공한 이후 전두광은 홀로 화장실에서 격렬한 웃음을 터트린다.
이에 대해 배우 황정민은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만큼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 감독은 황정민과 3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김 감독은 "전두광은 이태신으로부터 자기 존재, 자기 생애를 부정당하는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전두광의 승리가 승리처럼 안 보일 거 같았다"며 "전두광은 탐욕에 함몰되고 삼켜졌기에 자기 존재는 다 지워지고 욕망덩어리 자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전두광에겐 영광의 기록…"관객들은 박수 칠까"
'서울의 봄'을 붙잡고 엔딩에 이르기까지 김 감독은 '왜 이 영화를 하고 싶고 만들고 싶은지'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엄연한 현실이고, 자신도 겪은 일이고, 모든 국민이 잘 아는 일인 만큼 '이게 맞나?' '이렇게 찍어도 되나?' '이렇게 조명해도 되나?' 등을 거듭 고민했다.
그는 모든 고민을 떠올리며 "영화를 찍으면서 한 번도 머뭇거리면서 해본 적 없다. 그런데 역사와 영화 사이 어딘가 어중간한 데서 내가 정처 없이 서성거리는 모습이 '서울의 봄'의 태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야만 이 영화가 재밌으면서도 내재한 핍진성(逼眞性·문학 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 시키는 정도)을 잃지 않겠다고 자기를 합리화하며 찍었다"고 했다.
"그 사진은 그들에게 승리의 기록이에요.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다 모여서 진용을 갖추고 기념사진을 찍었겠어요? 그런데 관객들도 그들과 똑같이 느낄까요? 그걸 본 관객들은 그 사람들에게 박수치지 않을 거 같아요. 대신 제가 그때 느꼈던 수수께끼처럼, 역사적인 호기심을 갖고 그 사진 속 이야기로 돌아갈 겁니다. 그렇게 진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각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 사진의 의미는 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