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③"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④日 차별과 혐오에…더불어 견디며 삶 도운 '제주공동체' ⑤국경 넘어선 4·3밀항인의 '고향 사랑'…제주 발전 토대 ⑥'남북분단 축소판' 재일제주인 사회…이산가족까지 ⑦"유령 같은 존재"…역사의 어둠 속 묻힌 제주4·3밀항인 ⑧끊이지 않는 혐오와 차별…몰이해와 무관심이 경계로 (끝) |
2018년 4월 내전을 피해 제주에서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제주에 머물자 사회적 긴장이 수개월간 이어졌다. 특히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극심한 혐오가 터져 나왔다. 한편에선 '우리도 한때 난민'이라며 인도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그 난민은 바로 4·3밀항인이다.
'잠재적 범죄자' 두려움이 혐오로
예멘인들은 후티 반군과 정부군 간 내전을 피해 2016년부터 제주에 조금씩 입국했다. 그러다 2018년 4월 말레이시아에 체류하던 예멘인 수백 명이 무사증(무비자)인 제주에 들어와 한꺼번에 난민 신청을 했다. 이들 역시 4·3밀항인처럼 살아남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난 청년과 어린이였다.이에 화들짝 놀란 법무부가 출도(다른 지역 이동) 제한을 하면서 여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은 후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돼 있는 국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도움 받으려던 예멘인의 발이 묶였다. '섬'이라는 제주도 지리적 특성으로 예멘인의 존재감이 부각됐다.
이슬람이라는 낯선 문화권에 속해 있고 유럽의 대규모 난민 사태를 접한 국민들은 예멘인을 두려워했고 난민 반대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테러, 잠재적 범죄자 등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렸다. 제주에서 발생한 각종 범죄를 예멘인과 연루시켰다.
이러한 영향으로 예멘인에 대한 두려움은 난민 혐오로 변해 빠르게 확산됐다. 급기야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연일 열리거나 청와대 국민 청원이 70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일본 사회에서 추방 위협에 몰리고 '조센진' 등 차별과 혐오에 시달렸던 4·3밀항인의 처지와 비슷했다.
'내전이나 강제징집 피신은 국제법상 가장 일반적인 난민 보호 사유 중 하나로 난민 불인정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국가인권위원회 성명에도, 법무부는 예멘 난민 신청자 484명 중 2명에 대해서만 난민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인도적 체류허가 또는 단순불인정, 직권종료 등의 결정을 내렸다.
2018년 한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예멘인은 현재 제주 또는 다른 지역에서 정착해 살고 있다. 우려했던 '테러 위협, 범죄' 등의 문제는 불거지지 않았다. 지나친 혐오와 불안이었다.
차별·혐오 경계 넘어 온정의 손길
당시 거센 예멘 난민 반대와 혐오 여론 속에서도 일부 도민들은 묵묵히 수백 명의 예멘인을 도왔다. 사실상 정부의 인도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도민들과 시민단체가 나서서 숙식 지원을 도맡은 것이다. 자신의 집이나 작업실을 예멘인들의 생활공간으로 선뜻 내준 도민들도 있었다.특히 낯선 한국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제주도 8개 지역에서 한국어 수업이 진행됐다. 도민 40여 명이 자발적으로 봉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도민들의 이러한 '온정'은 당시 유럽 등 주요 선진국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난민에 대해 국경을 닫고 있는 상황인 탓에 더 두드러졌다.
70여 년 전 4·3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제주인 역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혐오와 차별의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차별과 혐오에 함께 맞서 싸워준 일본인이 있었다.
4·3 당시 군경 토벌대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故 강영일(1925년생) 씨는 생전에 제주시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식민 지배를 받아서인지 대놓고 '반도인'이라고 부르며 무시했어. 특히 밀항인 대부분이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생활했던 터라 깔보고 차별하는 게 상당했지"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외국인 등록증을 받거나 강제 추방 위기 속에서 도와준 일본인들이 있었어. 이들이 인권변호사나 지식인이었지. 아직도 그 마음이 고마워서 수첩에 이들의 이름과 함께 사무실 주소를 적어서 간직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4·3밀항인에게도 일본 사회의 온정이 있어졌던 것이다.
1970년대부터 이어진 각종 차별 철폐 운동에도 일본인이 함께했다. 외국인을 범죄자 취급하던 '지문 날인' 거부 운동, 취업제한 취소 소송 등에서 일본인 인권변호사가 도와줬다. 일본인과 재일동포의 하나 된 움직임으로 일본 사회에 자리 잡고 있던 차별과 혐오의 벽은 서서히 허물어졌다.
몰이해와 무관심이 벽의 경계로
예멘 내전 이후에도 미얀마 내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유엔 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현재 전쟁으로 고국을 떠난 사람이 1억300만여 명이다. 제2의 예멘 난민, 제2의 4·3밀항인이 끊임없이 나오는 상황이다.특히 4·3밀항인이 일본 사회에서 겪었던 차별과 혐오는 다른 모습으로 현재까지 우리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장애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외국인 혐오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당시 예멘인을 돕다 항의와 욕설 전화를 빗발치게 받았다는 고은경 글로벌이너피스 대표는 현재 제주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UN 세계시민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고 대표는 "UN 세계시민교육에서는 난민 문제도 다룹니다. 그들이 왜 고향 땅을 떠나 여기까지 왔을까, 왜 난민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서로 토론합니다. 또 다양성 존중을 가르치는데,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차별이 생기게 되고 차별이 심화하면 혐오로 변하게 되거든요"라고 말했다.
4·3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뒤 한평생 '경계인'으로 살아온 김시종(94) 시인. 그는 2019년 5월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4회 제주포럼-4·3과 경계, 재일의 선상에서' 세션에서 '경계는 내부와 외부의 대명사'라는 기조강연을 통해 경계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오감을 가로막는 것은 전부가 버티고 선 벽의 경계입니다. 인종차별이나 지역차별, 신체장애자와 여성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 그 대부분이 개개인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스스로가 쌓아 올린 벽으로 경계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