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강사로 학교 밖 청소년들을 10년 동안 가르친 김태훈 감독은 당시 맨 뒷자리에서 잠만 자던 친구를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를 피해 밤길을 헤매느라 잠을 자지 못한다는 아이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감독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영화로 세상을 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영화를 통해 그 친구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영화가 '빅슬립'이다.
언제나처럼 거리를 헤매던 길호(최준우)는 우연히 만난 기영(김영성)의 호의로 하룻밤을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단지 하룻밤이지만 길호는 기영의 거친 태도 속에서 다정함을, 기영은 길호의 믿지 못할 행실 속에서 연약한 결심을 눈치챈다. 각자 지리멸렬한 낮을 지나 뜬눈으로 밤을 지켜낸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하지만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을 지나 마침내 따뜻한 단잠에 이른다.
'빅슬립'은 영화의 엔딩인 따뜻하고 밝은 햇살 아래 잠든 기영과 길호의 모습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여정이다. 비슷한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오해, 사회가 찍은 낙인을 넘어 서로에게 닿아 서로를 구원하고 치유하는 여정을 그린다.
김태훈 감독은 이 모든 순간을 지나고 마주하는 인물들의 상처를 덧나지 않게 위로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두운 밤거리와 깊은 내면의 상처에도 저마다의 빛으로 반짝이는 인물들을 오롯이 담아내고 싶었다. 이번 인터뷰는 이에 대한 감독의 고민과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들에 관한 선입견 벗고 이해할 수 있길"
▷ 첫 장편 데뷔작 개봉을 앞둔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많은 관객분이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처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정말 적은 관객이라도 직접 만나 뵙고 그분들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 내가 만났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심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 본인의 경험을 녹여낸 작품이라 들었는데, '빅슬립'의 시작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
'빅슬립'을 만들기 전 거의 십 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교 밖 청소년도 있고, 소년원 나온 친구들도 있었다. 굉장히 오랜 시간 아이들을 통해 나 자신을 반추하게 됐는데, 내가 만약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를 찍는다면 이 아이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무슨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한 번 표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오히려 내 이야기가 나올 거 같다고 생각했다.
▷ 누군가를 오해하기는 쉽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영화는 어려운 이해의 길을 가고자 하는 기영과 길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둘을 통해 관객 역시 오해에서 이해로 나아가는 것 같다.
나도 그 부분을 진짜 중요하게 생각했다. 수업할 때 초창기 아이들을 보고 나도 선입견으로 대했던 거 같다. 처음에는 오해로 시작했던 거 같다.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선입견이 깨지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아이들을 통해서 오히려 내가 배울 수 있었다.
뭔가 가까이 하기 힘들 거 같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정말 따뜻한 아이들일 수 있다는 걸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는 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내 목표는 이 짧은 시간 안에서도 우리가 그들을 사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도 선입견으로 볼 게 아니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 현 영화의 톤앤매너를 결정하기까지 가장 고민한 건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내가 등장인물의 상처를 덧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불행을 다루는 데 있어서 조심할 수 있으면 최대한 조심하려고 했다. 그걸 뭔가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서 포장하는 방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게 첫 번째였다. 그래서 이야기를 쓰고 사운드 믹싱을 할 때까지 이런 태도를 스태프들과 늘 공유하고, 나 자신도 굉장히 오랜 기간 다잡았다.
▷ 기영(김영성)과 길호(최준우)라는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중심에 뒀던 키워드가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하다.
사실 이 세계가 먼저였다. 폭력적인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가 먼저였다. 기영은 폭력적인 아버지의 요소를 보고 자라면서 그게 겉모습이든 성격이든 캐릭터성을 대물림받았다. 하지만 어머니라는 존재, 이 영화 속에는 부재하고 있는 어머니 혹은 여성성이란 부분은 기영이 폭력성에 저항하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기영은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길호라는 아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영이 굉장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성 배우와 소통하는 과정에서도 기영은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고, 이를 논의하는 순간 기영이 굉장히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운명에 맞서는 사람처럼. 그래서 이 이야기 자체도 어떻게 보면 기영이 아버지처럼 될 것인가, 혹은 자신만의 방식과 태도를 갖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런 이야기가 됐던 거 같다.
빛나는 배우들의 놀라웠던 순간들
▷ 기영과 길호는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거칠게 굴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데 대한 거리낌을 보인다. 이것 외에도 아버지 문제로 복잡하다는 점도 그렇고, 기영은 길호를, 길호는 기영을 통해 내면의 어떠한 지점을 건들게 되는 것 같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나 자신을 진짜 많이 보게 된 거 같다. 선생님으로서 처음 시작했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선생님으로 다가가면 절대 선생님이 될 수 없다는 거였다. 어른으로 다가가면 어른이 될 수 없다. 호명하는 건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솔직하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을 통해 나 자신을 되게 많이 돌아봤다.
그래서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기영이란 인물이 길호라는 거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저항감 같은, '더 좋다' '낫다'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영 역시 자신이 어디쯤 있겠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 배우 김영성과 최준우는 어떤 점에서 각각 기영과 길호를 완성해 줄 거라고 생각해 캐스팅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대부분 오디션을 통해 만났는데, 진짜 영화를 찍는 것보다 더 열심히 찾아 헤맸던 거 같다. 거의 3천명 넘는 분이 지원해 주셨고, 그분들의 영상과 프로필을 하나하나 다 체크하고 많이 만났다.
김영성 배우는 거의 오디션 끝에, 마지막 날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만났다. 거의 포기하고 있을 시점에 김영성 배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진짜 그냥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영인가!'(웃음) 모든 스태프가 오디션에 다 있었는데, 다들 서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연기를 시작하는데,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잘하고 말고를 떠나서 나랑 대화하면서 진짜 기영을 창조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길호 캐릭터는 선입견을 견제하다시피 했기에, 그냥 사랑스러운 아이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기 잘하는 아역 배우들과 20대 초반 성인 배우까지 굉장히 많이 만났는데, 최준우 배우는 정말 다른 결의 연기를 보여줬다. 마치 자기의 매력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듯이 '연기라는 건 이겁니다!' 하는 것처럼 보여주는데, 그게 굉장히 놀라웠다.
▷ 김영성과 최준우 배우 외에 오디션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배우가 있나?
제일 재밌었던 캐스팅은 영범 역 김한울 배우다. 그 친구는 진짜 연기 경험이 없었는데, 내가 올려놓은 글을 보고 친구랑 찍은 영상을 보냈다. 연기는 못하는데(웃음) 너무 사랑스러워서 오디션장에 불렀다. 유일하게 그 친구만 대본을 안 외우고 와서 대본을 보고 해도 되냐고 물었다. 보고 하다가 틀리더니 "에잇, 감독님, 한 번만 더 할게요!"라고 하는데, 그 순간 '이 친구다' 싶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친구라면 영범 역할에 정말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배우들은 정말 인간적이고, 진짜 좋은 사람들이고, 진짜 멋있는 사람들이다. 내 목표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빛나는 순간들을 캐치하는 거였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이 사람들이 빛나는 순간을 담으면 영화가 된다고 말이다.
▷ 시나리오 속 활자로 설명되고 정의됐던 인물들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다. 모든 장면이 그렇겠지만, 머릿속으로 그려봤던 기영과 길호의 모습보다 더 뛰어난 해석으로 표현해 놀랐던 장면이 있었다면 무엇일지 궁금하다.
꽤 많다. 진짜 매 순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 한 가지만 딱 꼽자면, 그 신이다. 기영과 길호가 델리만쥬를 먹으면서 걷고 대화하는 신은 내가 생각했던 뉘앙스보다도 훨씬 더 잘 표현됐다. 진짜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지금 영화 속 장면이 첫 테이크다. 그때 나만 사운드를 듣고 있었는데, 카메라도 완벽하게 세팅되지 않았던 때라 속으로 '오케이인데 어떡하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둘의 연기가 너무 생생했다.
난 그 장면에서 기영은 더 틱틱 거리고, 길호도 뭔가 약간의 견제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정말 오래된 친구처럼 이야기했다. 그 순간 나도 '이거지!'라고 생각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시간 안에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된 게 느껴졌고, 관객들도 느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되게 신났던 기억이 있다.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