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③"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④日 차별과 혐오에…더불어 견디며 삶 도운 '제주공동체' (계속) |
지난 10월 14일 오후 오사카시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600m 가량 이어진 골목이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국 음식과 잡화를 파는 가게마다 줄을 선 일본인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한류 붐으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만, 과거 '일본 속 작은 제주' 이곳은 차별과 혐오의 공간이었다.
'조센진' '마늘냄새' 일상적인 혐오
4·3 광풍을 피해 우여곡절 끝에 오사카 이쿠노구로 건너온 제주인들. 고되고 위태로운 삶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냈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혐오와 차별은 그들을 무너지게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제주로 온 뒤 해방 직후 다시 일본으로 밀항 온 김용례(87·여)씨는 "지금은 코리아타운 가면 일본인들이 좋아하지만, 옛날에는 차별이 심했지. 목욕탕에 가서 앉으면 '마늘 냄새 난다고 저리 가라'고 하면서 싸움 거는 사람도 있었어. 집도 잘 안 빌려주고"라고 기억했다.
4·3 당시 일본으로 밀항한 아버지를 둔 재일제주인 2세 이철(74)씨는 어렸을 때 겪은 혐오를 기억하며 고개를 저었다. "차별은 일상이었지. 옛날에는 여름에 아침체조란 게 있었어. 한 달 내내 하면 연필 두 자루를 줬어.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일본인이 와서 '조센진 키에로(꺼져)'라고…."
일본사회의 차별과 혐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주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기도 했다. 일부러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일본학교를 다니는 등 일본인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첫 만남에 "4·3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않았다"고 농담을 던지던 재일제주인 2세 홍지웅(57)씨는 지난 10월 15일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낸 이쿠노구 거리를 취재진에게 안내했다. 홍씨의 어머니 강양자(82)씨는 4·3 직후 밀항으로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 와서 결혼하고 홍씨를 낳았다.
홍씨는 "인근에 조선시장이 있었는데 시장에 가면 조선인이라고 하니깐 얼씬도 안 했죠. 당시 한국인이면 일본사회에서 차별받으니깐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 '일본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해요. 지금은 '홍지웅'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도쿠야마 도모오'라는 일본이름을 썼어요"라고 했다.
'지문 날인' 범죄자 취급에…취업제한
4·3 당시 부모를 잃고 연좌제로 미래가 막히자 일본으로 밀항한 김대준(76)씨는 일본에서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 마음껏 살 수 있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외국인 등록증'이 없어서다.
일제 패망 직후인 1947년 5월 일본 점령군인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는 일본 당국의 요구에 따라 외국인등록령을 시행한다. 외국인 등록을 하려면 해방 전부터 일본에 거주한 사실을 증명해야 했는데, 밀항으로 일본에 온 경우 증명이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숨죽여 살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비참한 생활이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못하고요. 어떤 차별보다도 이게 가장 커요. 자유가 없는 게 사는 데 가장 큰 장애죠"라고 말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 과정에서 '지문 날인'을 강제했다. 열 손가락을 모두 지문을 찍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범죄자만 하던 것이었다. 어렵사리 외국인 등록을 하고 영주 자격을 얻어도 경찰·교사·소방 등 공무원이나 변호사를 할 수 없는 취업 제한이 있었다.
홍지웅 씨는 "16살 때 외국인 등록을 하라고 해서 시청에 가서 지문 날인을 하고 왔어요. 저는 일본인 학교에 다녔으니깐, 반에서 저 혼자만 평일에 쉰 거죠. '다른 학생들은 안 하는데 왜 나만 이것을 해야 하나. 아 나는 이 사회에서 이방인이자 아웃사이더구나'라고 느꼈죠"라고 했다.
차별·혐오 속 함께 의지한 '제주인'
일본사회의 차별과 혐오 속에서도 재일 제주인은 서로 의지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다. '일본 속 작은 제주'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제주 각 마을 출신들끼리 모여 살며 공동체를 이뤘다.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나고 자란 김대준 씨는 같은 지역 출신과 함께 '몽생이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친목 활동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같이 여행도 다니고 무슨 일 생기면 돕고 그랬죠"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몽생이회'뿐만 아니라 제주 각 마을 출신자들끼리 '마을회' 같은 모임이 있다.
특히 명절 때만 되면 지금의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에 있었던 '조선시장'에는 제수용품을 사러온 제주인의 행렬이 이어졌다. 조선시장에는 일본 다른 시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옥돔이나 조기, 콩나물 등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먼 타국에서도 조상에 대한 예를 지킨 것이다.
코리아타운에서 제주음식점을 운영하는 김순여(64·여)씨는 일본에 온 뒤로 수십 년 동안 빠짐없이 '제주식'으로 제사나 차례상을 차린다고 했다. 김씨는 4·3 당시 부모를 잃고 동생들을 키워낸 공로로 '4·3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어머니 故 김모열 씨가 알려준 대로 살아왔다.
"제주에서는 물질을 했었는데, 일본에 와서도 취미로 해요. 식당에서는 어머니께서 즐겨 드신 제주음식을 사람들한테 대접하죠. 우리는 비록 일본에 있지만, 제주도 사람 아닌가요. 어머니께서 '조상한테 잘해야 잘 산다'고 하셔서 옛날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대로 차례상 차리죠."
재일제주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올해 4월 29일 오사카시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에 문을 연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 자료관'을 기념하며 재일제주인 김시종(94) 시인은 '헌시'를 썼다.
'주위는 너도 나도 무뚝뚝한 조센징 / 오직 그 속에서 가게를 열고 / 더불어 견디며 삶을 도우며 / 마침내 코리아타운의 일본인이 되었다 / 사랑스런 <이웃사촌들> / 역시 흐름은 넓은 바다로 이르는 것이다 / 일본의 끝 코리아타운 거리에 / 열을 짓고 찾아오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있다 / 작은 흐름을 모아서 가면 본류인 것 / 문화를 서로 갖고 모이는 사람들의 길이 지금 크게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