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얄밉지만 어쩐지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권모술수' 권민우를 기억하는 시청자들에게 영화 '만분의 일초' 속 배우 주종혁의 얼굴은 낯설고도 흥미롭다. '우영우'를 통해 본 주종혁의 모습은 만분의 일 정도였을까. '권모술수' 이미지를 버리고 영화 속 재우 그 자체가 된 주종혁은 그가 남다른 내공을 가진 실력파 배우였음을 증명한다.
검도 국가대표에 도전장을 내민 숨은 실력자 재우는 가진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어린 시절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가둬버린 인물이다. 태수(문진승)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졌지만 폭풍 같은 내면으로 인해 흔들린다. 그런 재우의 복잡하게 뒤엉킨 채 터질 듯한 내면, 그 내면의 '만분의 일초'까지도 주종혁은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러한 주종혁의 연기를 두고 김성환 감독은 "검도 호면(검도에서 다치지 않도록 얼굴에 뒤집어쓰는 물건)의 철망 사이로 보이는 눈만으로도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배우"라고 극찬했다. 말 그대로다. 주종혁이란 배우가 가진 진가는 스크린 속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낸다. 인터뷰에서 만난 주종혁은 내내 눈을 반짝거리며 '만분의 일초'와 재우라는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그는 배우로서도, 개인으로서도 더욱 넓어지고 단단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종혁이 온몸으로 재우를 그려내기까지
주종혁이 연기한 재우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검도를 시작한 재우는 재난처럼 찾아든 '그날' 이후 검도를 놓은 채 살았다. 하지만 차마 내뱉지 못한 가슴의 응어리는 재우의 손에 다시금 검을 쥐여 줬다. 검을 든 순간, 재우의 아킬레스건은 자신마저도 잠식시킬 듯한 기세로 몰려온다. 결국 재우의 내면은 터질 듯 흔들린다.
주종혁은 처음 시나리오를 통해 재우를 만났을 때, 많은 상처를 안고 가는 재우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는 "누구나 가정사나 개인적인 아픔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그런 걸 빨리 잊고 표출하는데, 재우는 반대다. 끝까지 계속 안고 간다"고 말했다. 그렇게 재우를 하나씩 차근차근 알아가고 이해해 갔다.
주종혁이 재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뿐만이 아니다. 그는 "재우의 여러 감정을 많이 표현해야 하는데, 대사가 많이 없는 영화다 보니 그게 검도랑 접목됐다"며 "검도라는 소재랑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 역시 큰 매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촬영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호면의 반을 잘라서 클로즈업을 찍으면 호면의 그늘이 재우의 얼굴에 그림자로 생긴다"며 "재우의 외적인 모든 것 또한 내면과 잘 어우러져서 표현됐다"고 덧붙였다.
이어 "연기를 하다 보면 확실히 재우의 감정이 확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감독님이 잘 절제해 주셨다"며 "또 영화를 본 분 중 재우의 마음에 공감해 주신 분이 생각보다 많아서, 이해해 주신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고 이야기했다.
주종혁의 든든한 버팀목들
주종혁이 현장에서 재우로서 감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준 건 김성환 감독의 공이 컸다. 주종혁은 김 감독이 굉장히 디테일에 강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진짜 모니터 화면을 들고 내 앞머리 하나까지도 이야기하실 정도로 그 디테일이 정말 엄청나서 깜짝 놀랐다. 그 정도로 열의가 엄청나셨다"며 "그런데 또 되게 호탕하게 '오케이!'를 외치셨다. 에너지가 매우 크다 보니 내게는 힘이 됐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셨다"고 했다.
특히 "현장에서 태수의 첫 대사를 듣고 엄청 화가 많이 났었다. 태수의 톤이 너무 차분하고, 재우에게는 어떤 관심조차 없는 느낌을 받게 되니까 태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새롭더라"며 "'나라는 사람을 아직도 몰라?' 이런 느낌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장준이 형님은 소년미가 있어서 되게 밝다. 사람의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주셔서 항상 촬영이 끝나고 고민이 생기면 소통을 굉장히 많이 했다. 용석이 형도 그저 옆에만 있어도 듬직했다. 그래서 다들 너무 친하게 지냈다"며 현장의 기억을 즐겁게 떠올렸다. 그러면서 "준희 형에게서는 재우의 아버지와 겹치는 느낌을 받았고, 아버지의 이면적인 모습도 많이 본 거 같다"고 했다.
주종혁은 그렇게 한 뼘 더 자랐다
주종혁을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린 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민우일 것이다. 극 중 우영우(박은빈)를 견제하며 까칠하게 굴지만 어설프기도 한 변호사 권민우를 현실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시청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후 주종혁의 인기를 입증하듯 그의 이름 앞에는 '권모술수'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주종혁은 이 같은 수식어에 관해 "개인적으로 좋기만 하다"며 웃은 뒤 "'만분의 일초'를 찍은 후 참여하게 된 '우영우'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작품에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서 김성환 감독님에게 '지금 개봉하면 안 돼요?'라고 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지금 개봉하는 게 더 좋은 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권민우'라는 이름 자체도 많이 잊혀가는 시기고, 내가 연기한 재우는 권민우가 아니기 때문에 더 색다른 모습이라 생각해 주실 것 같다"고 덧붙였다. 권민우라는 캐릭터가 잊히고 있는 게 좋다는 건 그만큼 주종혁이 배우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시청자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다.
주종혁은 뒤늦게 연기를 시작해 단편 영화 '몽마'로 데뷔, 단편과 장편을 오가며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그는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단순히 나만을 위해서 한 거다. 연기라는 게 재밌고, 연기를 잘해서 사람들이 칭찬해줄 때 기분이 좋다는, 그런 단순히 이유였다"며 "그런데 이번에 배리어프리영화 홍보대사를 맡게 된 뒤 달라졌다"고 말했다.
"배리어프리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왔는데, 사실 되게 가벼운 마음으로 갔었거든요. 그런데 가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막 무게감과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책임감이 엄청 커지면서, 배우 일을 더 잘해 나가고 싶은 욕심도 들었어요. 영화를 하며 사람들에게 관심을 달라고 하는 위치에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웃음)
그렇게 주종혁은 한 뼘 더 성장했다.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며 쌓아 올린 건 필모그래피만이 아니었다. 배리어프리영화제 개막식에 앉아 있던 순간, 그 찰나에서 주종혁도 재우처럼 무언가를 발견해 놓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찰나'의 포착이다. '만분의 일초'처럼 말이다. 그는 "재우가 결국 깨달은 건 얻고 안 얻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만분의 일초'의 순간에 잠깐이라도 오른손을 놓은 거다. 그 의미가 많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주종혁은 오늘도 배우로서 성장해 가고 있다. 예비 관객들에게 '만분의 일초'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기 위해, 작품에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되기 위해 그에게 '한 줄'로 영화를 홍보해달라고 부탁했다. 한참을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쑥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호면 속의 재우와 태수의 호연을 보러 극장으로 와주세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