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계속) |
"오사카다! 도착했다!"
재일교포 2세 故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 첫 장면은 1923년 정기 연락선 군대환(君代丸, 기미가요마루)에 탄 제주도민들이 공장 굴뚝으로 가득한 일본 오사카를 환호하며 바라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도민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던 일본 오사카는 4·3 이후에는 '생존의 땅'이 됐다.
'기회의 땅' 오사카, '생존의 땅'으로
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는 '동양의 맨체스터'라고 불릴 정도로 굴뚝이 늘어선 거대 공업도시로 탈바꿈했다. 섬유·고무·유리·플라스틱 공장에는 일손이 늘 부족했다. 일본의 식민지 아래에서 생활이 어려워진 사람들이 한반도와 제주도에서 살길을 찾아 오사카에 건너와 공장에서 일했다.특히 1923년 3월 제주와 오사카를 정기적으로 잇는 군대환이 취항하면서 도민들의 오사카 대이주가 시작됐다. 취항 첫해 연락선 이용 인원은 8340명에 불과했지만, 이듬해 1만9385명, 1925년 2만5552명, 1926년 2만9362명, 1927년 3만6087명, 1928년 3만1465명 등으로 매년 늘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당시 제주 인구(20만 명)의 25%인 5만여 명이 일본 오사카에 살았다. 오사카 '이카이노(현 코리아타운)'에는 제주인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제주도민의 생활권 일부가 됐다. 실제로 받는 이의 주소에 '일본국 이카이노'만 적어도 제주에서 우편물이 도착할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10만 명이 넘는 제주인이 일본에 머물렀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그 중 절반인 5만여 명이 제주로 귀환했다. 하지만 제주에 식량난과 전염병에 이어 1948년 4·3이 일어나면서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기회의 땅'이었던 오사카에 '생존'을 위해 다시 온 것이다.
도항 금지에 해안 봉쇄…목숨 건 밀항
4·3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도민들은 '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패망 후 점령군인 연합국 최고사령부(GHQ)가 한번 귀환한 한국인의 일본으로의 재도항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1952년 일본이 독립한 뒤에도 유지되다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야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특히 4·3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 해안이 봉쇄되면서 목숨을 건 밀항이 이어졌다. 제주에서 고깃배 어창에 숨어 일본 본토로 건너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부산과 여수, 삼천포 등 남해안까지 와서 일본 대마도를 거쳐 가거나 곧바로 시모노세키나 규슈, 고베에 도착하는 패턴을 보였다.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항 인근 카페에서 만난 문영심(61·여)씨는 "지금은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4·3 때 밀항으로 대마도에 오셨어요. 4·3을 피해 온 분들이 시라다케산에 숨었다고 해요. 돌산이라 가파르고 위험한데, 거기서 숯을 구우면서 생활했대요. 지금도 흔적이 있어요"라고 증언했다.
밀항의 최종 도착지는 대개 일제강점기부터 제주 공동체가 형성된 오사카 '이쿠노구'다. 고향 땅을 벗어나 살 수 있는 곳은 친척이 있거나 과거 생활 경험이 있는 이곳이 유일했다.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태어나 해방 후 제주로 돌아왔던 강양자(82·여)씨는 4·3 직후 초토화된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마을을 떠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이쿠노구로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강씨는 부산으로 가 두 달간 지내다 한밤중 화물선을 타고 일본 본토로 밀항했다고 증언했다.
"해안에서 고깃배를 타고 먼 바다에 있는 화물선까지 갔어요. 배에 타보니 제주 사람 수십 명이 있었어요. 다들 '어디로 가느냐' '일본에서 뭐 할 거냐' 대화 나누다, 누가 '걸리면 안 된다. 수용소에 3년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아이고 무서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벌벌 떨었죠."
'인권침해' 온상…공포의 오무라수용소
'밀항'은 일본이나 한국에도 국가 권력 측면에서 불법 행위였다. 밀항자는 일본 당국에 적발되면 악명 높은 오무라수용소에 수용됐다가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는 것이 통상의 조치였다.한국인 밀항이 늘던 1950년 10월 일본 출입국관리청이 생겼다. 그 부속기관으로 나가사키현에 하리오수용소가 설치됐다. 같은 해 12월 오무라시로 이전해 '오무라수용소'가 됐다. 1950년 955명을 한국에 송환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까지 1만5천명이 강제 송환됐다.
수용소의 삶은 처참했다.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2015년 낸 '오무라수용소와 재일조선인의 강제추방 법제화' 논문에는 수용소의 인권 실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수용소로 이용된 해군 숙사와 선박에 감금된 상태에서 열악한 처우를 받았다. 심지어 선박 관리인이 수용자에게 배급하는 미곡과 연초까지 가로챘다. 수용소 내 경비원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했던 경찰들이었다. 수용자 규칙이나 인권을 보호하는 지침은 없었다.'
전갑생 연구원은 "모든 사람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있는데, 강제로 막았다.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고 위생 문제가 심각해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특히 밀항하다 적발되면 일본에서 처벌받고, 수용소에 수년간 수감되고, 송환돼 다시 처벌받는 '삼중' 처벌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2019년 전갑생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 발굴한 1949년 3월 강제 송환된 제주인의 모습이 담긴 7분짜리 영상에는 밀항에 실패한 제주인의 공포와 두려움이 엿보인다. '생존의 땅' 일본 오사카에 안착하지 못한 도민들은 다시 '죽음의 땅'으로 강제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