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4·3, 경계를 넘어서①]삶과 죽음
제주도 '빨갱이' 섬 규정…무차별 초토화 작전
가옥 4만여 채 불타고 제주 인구 10% 희생
"일본으로 가는 것밖에는 살 길이 없었다"
4·3 이후에도 연좌제 등으로 일본 밀항 이어져
밀항 관련 기록조차 없어…"유령 같은 존재"


제주 앞바다. 갈매기가 바다와 하늘 경계 사이를 자유롭게 날고 있다. 고상현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계속)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일본 문학계에서 존경받는 재일제주인 김시종(94) 시인. 4·3 당시 그가 제주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아버지의 말이다. 외아들인 그는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에 밀항선을 타고 홀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그처럼 제주도민들은 4·3 광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으면 죽고, 떠나면 살고"

4·3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주민 6명이 희생당한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후 민·관 합동 총파업이 이뤄진 데다 이듬해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 등을 반대하며 무장봉기가 일어난 것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만여 명이 희생됐다. 제주 인구(28만 명)의 10%가 목숨을 잃었다. 가옥 4만여 채가 불에 탔으며 중산간 마을 300여 곳은 폐허로 변했다. 총부리를 피해 산으로 들로 숨어 다녀도 붙잡혀 희생되기 일쑤였다.
 
도민들은 4·3 광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타버린 마을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제주 해안이 봉쇄된 터라 '밀항'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사고로 숨지기도 했다.
 
제주시 영평동에서 만난 박명식(93)씨. 고상현 기자

4·3 당시 제주시 영평동에 살다 마을이 불타버리고 큰형을 잃었다는 박명식(93)씨는 "여기 있으면 다 죽거든. 경찰이 죽이고 무장대가 와서 죽이고. 젊은 사람들은 못 살아. 우리보다 윗사람들이 많이 밀항했지. 밀항 못 간 사람은 경찰한테 걸려서 죽거나 징역 가서 죽었어"라고 기억했다.
 
무장대와 토벌대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일본으로 밀항한 故 강영일 씨는 생전에 취재진에게 "제주에 남으면 어떤 식으로든 죽을 수밖에 없었어. 일본으로 가는 것밖에는 살 길이 없었지. 어머니께서 전 재산이었던 소를 팔아서 밀항선이었던 고깃배에 나를 태워 보냈어"라고 증언했다.
 

4·3 끝난 후에도 이어진 일본 밀항

제주도민의 일본 밀항은 4·3이 끝난 1954년 이후인 197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4·3으로 전역이 초토화된 제주에서 먹고사는데 어려움을 겪거나 '연좌제'로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다.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한 식당에서 만난 김대준(76)씨는 1960년대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한다. 그는 4·3 당시 두 살의 나이에 아버지는 제주시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공항 활주로)에서, 어머니는 수장학살로 잃었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던 그는 4·3 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제주에 있을 때 늘 들었던 말이 '너희들은 이 나라에서 햇빛을 보려고 생각하지 마라'였어. 모르는 사람들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하는데 살 수가 있나. 부모 없이 할머니 밑에서 참 가난하게 살았지. 어느 날 일본 오사카에 계신 친척이 일본에 와서 살라고 해서 일본에 오게 된 거지."
 
4·3 당시 두 살의 나이에 부모를 잃은 김대준(76)씨. 고상현 기자

후지나가 다케시 일본 오사카 산업대학교 교수가 지난 2010년 펴낸 '재일 제주인과 밀항' 논문에 인용된 일본 경찰 당국자의 글에는 당시 한국인 밀입국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엄격한 반공정책은 국민에게 경찰국가 인상을 강하게 남긴 것 같다. 경제적으로 궁핍이 심해 국민 대부분은 항상 불안에 휩싸여 있다고 들었다. 일본의 안정된 생활을 동경해 작은 배에 몸을 실어 남북 상극의 조국을 떠나는 그들의 고충은 참으로 불쌍히 여길 만 하다.'

 

밀항 기록 전무…'유령 같은 존재'

 4·3 당시와 그 이후 이어진 제주도민의 밀항 관련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패망 이후 연합국 최고사령부(GHQ)가 한국인의 일본 입국을 엄격히 금지했던 터라, 도민들은 몰래 일본으로 건너와야 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 경계를 넘나드는 '유령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밀항인 수도 일본 당국의 적발 건수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GHQ 보고서 등을 분석한 문경수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명예교수에 따르면 4·3 전후로 제주에서 적어도 1만여 명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매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밀항한 것으로 보인다.
 
GHQ 보고서 표지. 문경수·고성만 교수 제공

특히 일본 당국에 체포된 도민들 취조 내용이 담긴 GHQ 자료에는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밀항의 절박감이 담겨 있다. 이름과 성별, 주소 등 신원이 실제와 다른 것이다.
 
문 교수와 함께 GHQ 보고서를 분석해 논문을 낸 고성만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는 "관련 기록에서 읽어낼 게 많다. 단순히 거짓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단편적인 생각이다. 안정적인 정착과 성공적인 도항에 대한 바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절박함의 흔적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제주항에서 30㎞ 떨어진 관탈섬에서 이틀간 숨어 지내다 아버지가 마련한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막 도착한 김시종 시인은 자서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오사카인지도 모르는 나 홀로 물가의 모래땅에 무릎을 껴안고 멍하니 배를 뒤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버렸습니다. 순식간에 흐느낌으로 얼굴이 눈물범벅이 됐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낯선 이국에 홀로 남겨진, 천애고독의 젊은이였습니다.'

제주시 용담동 다끄내 포구. 김시종 시인은 70여 년 전 4·3 당시 이곳에서 관탈섬으로 이동한 뒤 숨어 지내다 아버지가 마련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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