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자리에 서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첫 우승은 쉽게 느껴졌지만 나락은 한 순간이었다. 4년여의 시간, 어린 두 딸에게 "아빠가 프로당구(PBA) 선수"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세월이었다.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다시 시상대 맨 위에 섰다. PBA 원년 챔피언 최원준(45)이 4년 2개월 만에 정상을 탈환하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최원준은 15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열린 'NH농협카드 PBA 챔피언십' 남자부 결승에서 '튀르키예 전사' 비롤 위마즈(웰컴저축은행)를 눌렀다. 세트 스코어 4 대 2(15-5 14-15 10-15 15-3 15-9 15-2) 재역전승으로 우승을 장식했다.
PBA가 출범한 2019~2020시즌 3차 투어인 웰컴저축은행 챔피언십 이후 4년여 만이다. 최원준은 당시 정경섭을 누르고 정상에 올랐고, 이후 4시즌 만에 2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야말로 감격의 우승이다. 최원준은 원년 우승을 이뤘지만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우승 다음 대회에서 1회전 탈락의 아픔을 겪는 등 침체에 빠졌고, 다음 시즌에도 16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2021-2022시즌 4강, 지난 시즌 8강에 1번 올라 존재감을 확인한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최원준에게는 '반짝 우승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8번 우승한 최강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 지난 시즌 최우수 선수(MVP) 조재호(NH농협카드), '헐크' 강동궁(SK렌터카) 등 다관왕을 이룬 스타들에 비해 이름값이 떨어지는 데다 1번 우승에 그친 뒤 긴 슬럼프에 빠진 까닭이다.
설상가상으로 최원준은 PBA 2번째 시즌부터 시작된 팀 리그에서 활약했지만 다음 시즌 방출되는 아픔까지 겪었다. 블루원리조트에서 뛰었던 최원준은 2021~2022시즌을 앞두고 팀을 떠나야 했다. 더욱이 최하위였던 블루원리조트는 최원준이 떠난 뒤 챔피언결정전 준우승과 우승을 차지하며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그랬던 최원준이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이번 대회 최원준은 올 시즌 개막전 챔피언이자 세계 3쿠션을 주름잡았던 '예술구 마스터' 세미 세이기너(튀르키예·휴온스)를 32강에서 3 대 0으로 완파했다. 특히 올 시즌 5차 투어 우승자이자 한국인 최초 세계3쿠션선수권 챔피언 최성원(휴온스)와 4강전에서 풀 세트 접전 끝에 짜릿한 4 대 3 역전승을 거뒀다.
결승에서도 기세를 이었다. 최원준은 1세트를 따냈지만 위마즈에 2, 3세트를 내주며 끌려갔다. 그러나 4세트 최원준은 1이닝부터 폭풍 8점을 퍼부었고, 3이닝 6점 등으로 15점을 채워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최원준은 5세트 4이닝 하이 런 6점을 앞세워 전세를 뒤집었고, 여세를 몰아 6세트 정확한 옆돌리기와 뒤돌려치기, 뱅크 샷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우승을 확정했다. 2022~2023시즌 2차 투어인 TS샴푸·푸라닭 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던 위마즈는 1년 2개월여 만에 2번째 정상을 노렸지만 최원준의 신들린 샷에 막혔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최원준은 "반짝(우승)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라며 눈물을 쏟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감정을 추스른 뒤 "저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주신 분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첫 우승 뒤) 양지에서 음지로 내려간 상황이 됐는데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고 지난 세월을 돌아봤다.
최원준은 "지금 두 딸이 10살, 7살인데 첫 우승컵에 그동안 장난감과 과자를 담고 놀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우승이 뜸해 우승컵이 어떤 의미인지 두 딸이 잘 몰랐던 것. 최원준은 "큰 딸은 그나마 첫 우승을 기억하는데 작은 딸은 전혀 모른다"면서 "PBA에서 하도 많이 져서 애들에게 미리 '잘 하기만 하면서 살 수 없고, 질 수도 있다'고 세뇌시켰다"고 귀띔했다.
그만큼 슬럼프가 길었다. 최원준은 "PBA 초창기 때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우승 뒤부터 지키는 게 어렵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면서 "후원하는 큐로 바꾼 것도 있었지만 큐질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로 인해서 슬럼프를 너무 많이 겪었고 스폰서를 탓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밑바닥까지 갔던 그에게 계기가 찾아왔다. 최원준은 "다 내려놓은 가운데 아버지도 재작년 담도암으로 돌아가시고 지난해부터 현실을 직시하고 부족함이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했다. "(겉으로는) 아들이 당구하는 걸 되게 싫어 하셨지만 우승컵을 갖고 가셨다"던 아버지였다.
최원준은 멘털 상담 전문 교수, 블루원리조트 주장이자 선배 엄상필 등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교수님께서 '우승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곧바로 바닥에 내려오는 선수 너무 많은데 서서히 경험을 쌓고 올라가 우승하는 게 멘털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는 최원준은 "상필이 형도 '이 근처겠지 하며 대충 치고 하늘에 맡기지 말고 정확하게 설계해서 쳐야 한다'고 했는데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강조했다.
바닥을 치고 스스로 올라가려는 노력이 결국 빛을 발한 셈이다. 최원준은 "지금은 밑바닥부터 4년 동안 다시 올라왔다"면서 "탄탄하게 우승까지 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딸에게도 자랑스러운 아빠가 됐다. 질 수 있다고 세뇌시키는 게 아니라 떳떳하게 우승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최원준은 "이기고 나니 첫째가 '아빠가 힘들게 당구를 치는구나. 감동 받았다'면서 울더라"면서 "학교 가면 '우리 아빠 우승했다'고 친구들에게 알려준다고 하더라"고 자랑스럽게 전했다.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 등 가족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최원준은 "응원해주신 분들 이름을 다 대면 하루가 모자란다"며 성원에 대한 감사를 전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사랑하는 와이프 울고 있네. 어머니, 가족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런 아내는 기자 회견 말미에 "남편이 정말 정확하게 스트로크를 구사한다"고 화답했다.
4년여 만에 우승 상금 1억 원이 생겼다. 최원준은 전북 익산에 집이 있지만 주중에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 지역 당구장 매너지로 일하며 훈련한다. 주말에는 가계에 보탬이 되도록 장사를 하는 아내 대신 애들을 돌본다. 최원준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너무 어렵다"면서 "은행에 빌린 돈도 있는데 갚고, 응원해주신 분들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미소를 지었다.
2번째 우승을 차지한 최원준에게 내년 시즌 좋은 소식이 들릴 수도 있다. 최원준은 "시상식 때 NH농협카드 윤상운 대표이사께서 '내년 팀 리그 뛰는 걸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시더라"고 귀띔했다. 한때 방출의 아픔을 겪었지만 최원준의 두 딸은 다음 시즌 팀 리그에서 활약하는 아빠를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