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오백년 역사 품은 건봉사…분단 70년 상흔 곳곳에

[MZ대학생 DMZ 524km를 걷다②]

▶ 글 싣는 순서
①"와~저기가 북한이라구요?"
②천오백년 역사 품은 건봉사…분단 70년 상흔 곳곳에
(계속)


14일 DMZ 자유 평화 대장정 이틀 차 아침이 밝았다.

건봉사를 시작으로 소똥령마을과 용대삼거리를 거쳐 만해마을까지 약 15km를 걷는 여정이 곧 시작된다. 원정대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이동한 곳은 휴전선 이남 최북단의 사찰, 강원 고성군의 건봉사다.

조선 4대 사찰 건봉사, 쓸쓸하지만 고즈넉했다

건봉사의 관문인 '건봉사불이문'. 한국전쟁 당시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건축물이다. 박영규 인턴기자
본격적인 원정에 앞서 건봉사를 둘러볼 시간이 주어졌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남쪽 끝자락 자리하고 있는 건봉사는 6세기 서기 520년 신라 법흥왕 시기, 고구려의 아도 스님에 의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건축된 천년고찰이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조직해 훈련한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북부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31 본산의 하나로 신흥사와 백담사, 낙산사 등을 관할했다.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건봉산의 주변 경관은 고성8경(건봉사, 화진포, 통일전망대 등 고성군에서 선정한 진풍경)에도 꼽힐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어 관광객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사찰내 대부분의 건축물이 소실됐다. 민통선(민간통제선) 안에 있어 군부대의 검문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금기의 땅이다. 남북 분단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건봉사~송강마을 민통선 구간 6km에 도로 통행이 허용돼 군부대 검문 없이도 건봉사를 방문할 수 있다. 또한 극락전, 대웅전 등 일부 건물들이 복원돼 전국의 불교 신자들과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건봉사 대부분의 건축물은 소실됐다. 역사의 향기를 느끼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부족함이 진한 여운으로 승화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다.

버스에서 내려 건봉사 절터로 들어가자 '건봉사불이문'이 대원들을 맞이했다. 건봉사불이문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로 1920년 세워졌다.

14일 건봉사 내 극락전과 대웅전을 연결하는 다리 능파교. 한국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고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이도훈 씨 제공

이어 극락전과 대웅전, 능파교 등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며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 극락전 지역과 대웅전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인 능파교 역시 한국전쟁 당시 피해가 거의 없어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아름다운 자태에 비해 드문 인적은 관광 명소로서 발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어 여유를 즐기고 싶은 관람객들에게는 제격이었다.

소똥령마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소똥령마을 표지판. 박영규 인턴기자

길지 않은 건봉사 관람이 끝나고  본격적인 걷기가 시작됐다. 소똥령마을은 동해안 최북단 고성군 장신2리로, 이 마을은 본래 이름보다 '소똥령마을'이라는 별명이 훨씬 유명하다.

계곡 옆으로 길게 이어진 마을이라는 뜻의 장신리를 두고 별명을 쓰는 이유는 마을의 역사와 닿아 있다.

옛날 주민들이 인제 원통으로 소를 팔러 갈 때면 능선을 넘다 이 마을 주막에서 쉬어가곤 했다. 이때 주막마다 쇠똥이 수북이 쌓여 자연스레 마을 이름이 소똥령이 됐다고 한다.

정겨운 마을에도 분단의 역사가 서려 있다. 지금은 전체가 50가구도 되지 않는 작은 동네지만, 1960년대에는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당시 무장공비 침투가 잦아 군인 가족이 많이 이주했기 때문이다.

한때 마을에는 초등학교까지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휴전선 전방이 안정되고 군인들도 하나둘 떠나면서 학교도 문을 닫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이 마을도 이제 조용해졌다. 걷는 동안 주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14일 오후 DMZ 자유평화대장정 대원들이 소똥령마을로 향하고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건봉사에서 소똥령마을까지는 약 9km 거리다. 험준한 산길을 거쳐야 해 대원들이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전날에 비해 두 배 이상이나 되는 길을 걸으면서 물집이 잡혔다. 대장정 이틀 만에 몸이 힘들어 한다는 신호가 온 것이다.

아스팔트 길이라 더 힘들다는 말이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나만 힘든 것 같아". 기자 앞의 한 대원의 작은 소리를 들었을 때 꼴찌와 낙오의 두려움을 비로소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약 한 시간마다 4km를 걷고, 4km마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대원들은 그제야 길가에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어떤 이들은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낮 12시가 다 되어서야 천신만고 끝에 소똥령마을의 한 식당 어귀에 닿았다.

만해 한용운의 흔적을 찾아서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중략)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가 누군지 알아요?" 한 대원이 취재진에게 불쑥 물었다.

'만해', 우리에게는 '님의 침묵'이라는 기념비적인 시로 잘 알려진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인 한용운 선생의 호다.
 
점심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여정, 최종 목적지인 만해마을까지는 아직 6km가량이 더 남아 있었다. 만해마을은 한용운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으로, 만해문학박물관, 문인의집, 청소년수련시설(설악관, 금강관), 만해평화지종 등 10개 시설로 구성돼 있다.

몸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무거웠던 오래 걸었음에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만해마을에 가까워질수록 한용운 선생의 흔적들도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14일 만해마을에 만해 한용운의 흉상이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백담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만해 한용운은 이곳에 머물며 여러 저서와 시를 남겼다.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 격랑의 회오리 속에서 민족의 기개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을 겪으며 민중이 무참히 쓰러져 가는 광경을 목격한 만해는 그의 나이 25세에 홀연 출가를 결심한다.

그의 발길이 처음 다다른 곳이 바로 내설악 백담사였다. 물론 만해가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백담사의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전두환, 이순자 씨 부부가 이곳에서 셀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절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전두환이 1995년 구속되자 부인 이순자는 다시 백담사로 갔지만, 당시 인제군 의원들이 "여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무른 곳이지, 죄인의 은둔지가 아니다"라며 항의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대장정 3일차인 15일에는 피의능선전투전적비를 시작으로 하야교과 두타연을 걷는다. 대장정 중 가장 힘든 코스로 약 20km를 걸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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