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모 상병 순직사건 조사 결과를 둘러싼 의혹이 여전한 가운데 박정훈(대령) 전 해병대 수사단장 구속영장 청구서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장관님 지시 사항'이 진실 규명의 열쇠가 될지 주목된다.
국방부검찰단이 지난 8월 30일 청구한 박 대령 구속영장 청구서에는 해병대 정모 부사령관이 박 대령 등에게 전달한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의 지시 사항 4개가 명시돼있다.
정 부사령관은 7월 31일 오후 2시 10분쯤 이 장관으로부터 채 상병 사건 조사결과의 이첩보류 지시를 하달받고 이날 오후 4시쯤 해병대 수사단 회의에서 전달했다.
앞서 이 장관은 이날 오전 11시 56분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첩보류를 지시했지만, 당시 서울에 와있던 정 부사령관을 호출해 비슷한 지시를 반복했다.
구속영장 청구서에 따르면 김 사령관은 정 부사령관에게 '장관님 지시 사항'을 박 대령 등에게 설명하도록 했다고 진술했다.
이를 그대로 옮기면 ⓵수사자료는 법무관리관실에서 최종 정리를 해야 하는데, 혐의자를 특정하지 않고, 경찰에 필요한 자료만 주면 된다 ⓶수사 결과는 경찰에서 최종 언론 설명 등을 하여야 한다 ⓷장관이 8.9. 현안 보고 이후 조사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 ⓸유가족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해병수사단장 구속영장에 적시된 '4개 지시' 진실규명 열쇠 될까
이 가운데 1번 지시인 '혐의자 특정 배제'는 수사 개입을 자인한 격이라며 일찌감치 논란이 일자 국방부가 긴급 진화에 나섰던 사항이다.국방부는 "군 검사가 해병대 부사령관의 진술서를 바탕으로 요약한 것으로 확인했으며, 장관이 직접 언급한 내용이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의혹은 여전했다.
나머지 지시 내용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경찰에서 언론 설명을 하도록 한 2번 지시를 보면 이게 과연 국방부 장관의 지시가 맞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군과 경찰을 아우르는 모종의 권력이 개입했거나, 아니면 장관이 노골적으로 월권했다는 얘기가 된다.
'장관이 8.9. 현안 보고 이후 조사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는 3번 지시는 수수께끼에 가까운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조사 결과를 보고하여야 한다'는 장관의 책무를 스스로 언급한 것으로, 자기가 자신에게 '셀프 지시'한 격이다.
국방장관이 경찰에 언론 설명 지시? 군‧경 아우르는 권력의 개입, 또는 노골적 월권
구속영장 청구서란 공문서의 무게를 감안하면 잘못된 문장인 비문이 기재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문장 그대로 장관이 누군가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뜻으로 독해할 수밖에 없다.이 경우, '누군가'는 당연히 장관의 상급자나 상급기관이 돼야 한다. 결국 구속영장에는 '장관님 지시 사항'이라고 기술돼있지만 실은 그보다 윗선의 지시라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이와 관련해 3번 지시에 등장하는 8월 9일이라는 시점도 의미심장하다.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은 8월 2일 ~ 8일 휴가(하루 단축)였고, 이 계획은 7월 31일 발표됐다. 국방장관이 '이첩보류'를 지시하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한 날이다.
한 소식통은 "통상 '현안보고'라는 용어는 VIP(대통령)나 대통령 비서실장, 안보실장 선까지의 보고를 의미한다"며 '8.9. 현안 보고 이후'를 언급한 3번 지시를 주목했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구속영장에는 박 대령 항명 혐의의 핵심 증거로 기술된 '장관님 지시 사항' 4개가 공소장(10월 6일)에는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이다.
이는 국방부가 작성했지만 작성 지시자는 밝혀지지 않아 '괴문서' 논란을 일으킨 '해병대 순직사고 조사 관련 논란에 대한 진실' 문건에서도 마찬가지다.
군 검찰이 박 대령에게 적용한 혐의가 집단항명 수괴죄에서 항명죄로 급변침한 것과 비슷하게 구속 및 기소의 핵심 근거마저 오락가락 했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의구심이 풀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