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대한항공 무자격 조종사' 진실 밝혀냈지만…그는 한국을 등졌다 ②'무자격 조종사' 대한항공은 어떻게 면죄부를 받았나 ③대한항공의 이상한 제안 "소송하면 보상하겠다" (끝) |
'무자격 조종사 채용'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대한항공은 이를 폭로한 이채문씨에 대해서도 손해배상을 해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무자격자 채용'에 대해 아무런 형사 처벌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이겼다는 게 근거였다.
하지만 대한항공이 수년간 이씨에게 보상을 해주겠다고 설득하면서 협상을 벌인 것으로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 확인됐다. 이는 대한항공의 기존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히 서용원 전 대한항공 대표이사는 2020년 이씨에게 소송을 걸면 보상을 해주겠다는 특이한 제안을 했다. 그냥 보상을 해주면 배임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를 대면서다.
서 전 대표는 '시간 끌기 아니냐'는 이씨의 의구심에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끝내겠다"고도 약속했다.
그동안 소송 전으로만 일관한 이유에 대해선 이씨를 주저앉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실토했다. 대한항공이 애초부터 '무자격 조사' 문제를 인지해 놓고 이씨를 허위 고소해 실형을 살게 하려고 했던 게 아니냐는 강한 의심을 낳는 대목이다.
대한항공 임원급 3명이 붙어 설득 작업
CBS노컷뉴스는 대한항공 전현직 임원 3명이 최근 몇년 사이 '무자격 조종사 채용'을 폭로한 이채문씨를 만나 설득 작업을 벌인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확보했다.
대한항공이 본격적인 협상을 시도한 때는 '무자격 조종사 채용'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 대한항공이 이씨를 고소한 기존 명예훼손 사건 재판에 대해 법원이 재심 결정을 내린 2016년 3월부터다.
처음 이씨를 만난 사람은 이모 상무였다. 2019년 5월 16일자 녹취록을 보면, 이 상무는 계속해서 "열흘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씨는 3년 가까이 접촉해온 터라 이날은 배상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또 허사였다.
이씨: 현재 사람이 그 협상을 해야지. 이 상무: 제가 다음주에 23, 24일 날이 우리 임원 세미나예요. 이씨: 아~ 정말. 나는 오늘 또 뭐 좀, 뭐 돈 가지고 올 줄 알고 기대하고 여기 왔는데 계속 실망시키고 그러니까 아이, 정말. 이 상무: 그러니까 다음 주말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
2019년 5월 16. 부천시 고강동 식당 |
난항을 겪던 두 사람의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보상 금액을 놓고 의견이 맞지 않은 상황에서 이 상무가 공갈·협박으로 고소하겠다는 발언을 하자, 이씨가 "그렇게 하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씨는 당시 연봉이 1억5천만원이었는데, 1억원으로 계산해 정년까지 남은 기간 16년을 곱해 16억원을 제시했다. 이에 이 상무는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다며 맞섰다.
"20년간 고통 내가 알지, 보상하는 쪽으로 변경했다"
이씨와 이 상무가 틀어지면서 등장한 인물이 서용원 전 대한항공 대표이사다. 그는 한진의 대표이사를 맡기도 했으며 2020년 6월 5일 이씨와 처음 접촉할 당시는 대한항공 고문이었다. 서 전 대표와 동행한 사람은 강모 전무였다.
대한항공이 보상 차원에서 과거 이씨의 아들을 입사시켜주겠다고 제안한 사실도 확인됐다.
이씨: 당신을 복직시키면 당신하고 같이 잘린 사람 다 해줘야 되지 않냐. 그러니까 당신만 할 수 없으니까 당신 아들 지금 대학교 다니고 있지 않느냐. 그걸 해주겠다. (회사 측 제안에 대한 설명) 서 전 대표: 아니, 그건 뭐 그런 얘기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씨: 그래서 내가 아, 나는 필요없다. 나는 아들 (채용) 필요 없다. 서 전 대표: 내가, 내가 담당 상무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더 있느냐고. 솔직히. |
2020년 6월 5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호텔 커피숍. |
이 자리에서 서 전 대표는 회사의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어투로 협상을 마무리 짓자고 제안했다.
"이채문 씨도 고생 많이 하고 또 가슴 아픈 응어리가 있고 그 고통을 내가 알고. 그러니까 20년 동안 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뭔가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마무리 짓는데 그것보다도 내가…"
같은 해 9월 24일 이씨과 서 전 사장은 다시 만났다. 장소는 처음과 같은 서울 강서구 공항동에 있는 호텔 커피숍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대한항공이 소송전을 통해 이씨를 주저앉으려 했다가 보상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설명이 나왔다.
서 전 대표 : 아니, 아니, 내 말 믿어, 내 말 믿어. 응? 적어도 내가 그래서 내 생각에는 회사가 이제는 방향을 변경했잖아. 당신한테 보상하겠다는 거. 응? 이씨 : 그거 5년 전에 하려 했던 거야. (보상 협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취지) 서 전 대표 : 아니, 지금, 이씨 : 이OO가 만나서… 서용원 : 아니야, 아니야. 그때는 그래. 내가 다 알아. 그거 아니야. 회장한테 계속 당신을 갖다가 어떡하든지 설득해서 주저앉으려고 했지. 그런 작전이었지. 지금은 그게 아니고 당신한테 보상을 해주겠다는 의미로 가는 거니까, 응? |
2020년 9월 4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호텔 커피숍. |
서 전 대표는 원하는 대로 고소장을 작성해서 빨리 제출을 하라고 재촉했고, 이씨는 재판을 하면 3개월 이상 걸린다면 '시간 끌기' 아니냐고 의구심을 나타냈다.
서 전 대표 : 아니, 당신은 지금 억울한 걸 다 써가지고 내가 얘기한 대로 써가지고 빨리 소송을 제기해. 얼마, 곱하기 얼마 해가지고. 응? 이씨 : 그거 3개월 걸려, 3개월. 서 전 대표 : 안 걸려! 우리가 그 소송 실제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한다니까? 재판 자체가 안 이루어지도록 할 테니까 하자 얘기야, 응? 이씨 : 그럼 얼마 줄 거야? 서 전 대표 : 아니, 그런 소리 내가 못하지. 이씨 : 응? 서 전 대표 : 그건 못 해. 지금, 무슨 못 해. 당신이 일단 요구하고. 이씨 : 그거는 말이야 16억을 줘도 말이야 그거 세금 떼면.. 서 전 대표 : 그거 하면 되는 거야. 실질적으로 재산세, 재산상의 손해, 정신적인 손해. 응? 이씨 : 응. 서 전 대표 : 그거 다 포함해서, 응? 또 명예훼손 다 포함해서, 응? 회사한테 소송을 걸라고, 응? 그런데 지금 아마 잘할 거야, 사람들은. 응? 이씨 : 지금 또 그래, 또 이거 교묘하게 또 시간 끌려고. 서 전 대표 : 아이씨! 이씨 : 시간 끌려고.. 서 전 대표 : 아니라니까! 내가 그거 하면 뭐해? 당장 나는 해결하려고 하는 거라니까? 나도 내 돈 받아야 돼, 빨리. 그러니까 빨리하라고. 응? 응? |
2020년 9월 4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호텔 커피숍. |
이씨는 과거에는 왜 제대로 협상을 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캐물었다. 서 전 대표는 회사에서 처음에는 보상할 마음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아니, 그때 당시는 '이채문 나쁜 X, 회사에 욕하는 X, 회사 명예훼손 하는 X' 이렇게만 해서 막는 것만 생각했다니까"
이씨는 '무자격 채용'을 폭로하게 된 계기가 됐던 불공정한 인사 문제도 언급했다. 서 전 대표는 이를 반박하지 않았고 사실상 인정했다.
이씨 : 왜 저 인하대 나온 X만, 어? 인하대 나온 놈은 헬리콥터만 290 몇 시간 탄 놈은 그냥 시키고 나는 비행기에, 어? 2,500시간 타고 왔는데 나 안 시켜주고. (비행 조종사 자격이 안되는 특정학교 출신만 기장으로 승진시켰다는 의미) 서 전 대표 : 그러니까. 이씨 : (…) 안 시켜주고. 서 전 대표 : 아, 그건 우리는 몰랐지. 운항 XX들이 알았지. 이씨 : 그거 다 이야기했는데, 뭐. 응? 서 전 대표 : 그런 저기니까 저기 이채문 씨는 (…) 이씨 :인하대 X들은 군에서 헬리콥터 한번 탔다고 그것도 290 몇 (시간) 타고, 응? 계기비행도 안 나오고, 어? 전부 다 조작해가지고 그랬는데. 서 전 대표 : 그러니까, 그러니까. |
2020년 9월 4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호텔 커피숍. |
20년 전 수준에서 보상? 협상인가, 꼼수인가
대한항공 측의 제안으로 이씨는 2020년 9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원은 지난해 6월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다. 대한항공이 이씨에게 3억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이씨는 이 금액이 1년 간 징역과 실직 등 자신의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해권고 결정 과정에서 대한항공 측은 구체적인 보상금액을 제기하지 않다가 판사의 거듭된 요청에 2억1천만원을 제시했다. 이는 애초 양측이 합의했다는 2억5천만원보다도 적은 금액으로 법원이 화해권고에 앞서 조정했던 금액이다.
판사: 소정이라는 게 원고에게 어느 금액 이상을 지급할 용의가 있나는 취지입니까? 피고: 예. 그러니까 원고가 지금 많은 금액을 애기를 하셔서 저희가 사실 그 금액은 좀 그렇지만 그래도 하여튼 저희로서는 너무 대응하기 힘이 든 상황이라 그래서… 판사: 다음 기일 속행을 바라신다면 그럼 피고 측에서 현 상태에서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을 지금 말씀해 하세요. 그러면 화해권고는 하겠습니다. 피고: 예. 판사 그냥 양 당사자 사이에 오고 간 금액을 말씀을 하세요. 피고: 예. 저희는 뭐 사실 많이 드릴 수는 없고요. 사실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이라서 좀 만약에 화해권고를 해주신다고 해도 저희는 지난번 조정부에서 조정 위원께서 해주신 그 저도 금액(2억1천만원) 이상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략) 이씨: (….) 저는 16억원은 안된다 그래서 그걸 3년 동안 200여 차례 만나고 하다가 안되니까 이제 그 한진 서용원 사장이 맡아가지고 그때는 60세까지 정원이었으니까 11억원으로해라, 11억원을 제시했었습니다. |
2022년 6월 10일. 서울 남부지법. |
서 전 사장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라고 한 이유는 코로나19여파로 경영난을 겪은 대한항공에 산업은행 등이 1조2천억원의 정책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채권단이 지켜보고 있어 함부로 보상금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3억원의 화해권고 결정을 이씨가 거부하면서 사건은 정식 재판으로 넘어갔다. 지난 해 9월 판사는 공판에서는 대한항공 손을 들어줘 이씨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판결은 올해 9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대한항공 측은 5차례의 조정 과정에서 금액을 제시하지 않아 보상액을 놓고 제대로 된 의견 교환이 없었다. 대한항공에서는 애초 일정 금액을 정해 놓고 적당히 봉합하려는 전략을 쓴 것으로 보인다.
서 전 대표의 해명은 녹취록에 나온 것과 사뭇 달랐다. 그는 이씨와 만나 "억울한 게 있으면 소송을 하라는 건 얘기했다"고 CBS노컷뉴스에 말했다. 서 대표는 이어 "(이씨가) 억울한 게 있으면 소송을 하고 회사에서는 억울한 게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해야(살펴봐야) 될 게 아니냐"며 "그런 차원에서 얘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 전 대표는 '보상을 언급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보상할 필요가 없다. 회사가 잘못한 게 있어야 보상을 하지 않느냐"고 답했다. 대한항공은 해당 녹취록 내용에 대해 "회사에는 알 수 없는 부분"이라만 짧게 답했다.
이씨는 대한항공을 무고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소송도 다시 제기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