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 왜 '형제묘'를 지웠나…여순의 주홍글씨는 비문보다 깊었다 ② '빨치산'에 가려진 광양의 여순…75년 만에 푸는 금기의 빗장 ③ 여순사건 중앙위 늑장 심의에 고령 유족들 "어느 세월에…" ④ 독립유공자도 학살 피해자도..누명 벗으려 법정 찾는 여순 유족들 (끝) |
이듬해 1월 박창래 씨의 아내는 평소 남편과 친분이 있던 화양지서 경찰로부터 박 씨가 처형될 것이란 말을 듣고 명주저고리와 바지를 마련해 경찰을 통해 전달했다.
아내와 차남은 경찰서 앞에서 남편이자 아버지가 탄 트럭을 먼발치에서 바라봤다. 트럭은 만성리 굴 방향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트럭이 떠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집이 불타는 장면을 목격했다.
남은 가족들은 다른 친척 집으로 피신했고 이후 만성리 굴 일대에서 여러 번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박 씨의 장남 박회순 씨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김천형무소로 이감됐고 한국전쟁 발발 과정에서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
박창래 씨는 1930년 3월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박 씨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이처럼 박 씨는 정부가 인정한 독립운동가지만 여순사건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뒤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주홍글씨로 낙인찍혔다.
박 씨의 손자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을 신청했고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지난 7월 박창래에 대해 "여순사건 이후 군경이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법원이 발부한 영장 없이 체포·감금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면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그러나 박 씨의 장남 박회순에 대해서는 신청인과 조카 관계라는 이유로 배우자나 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로 규정된 재심청구권자 자격이 없다며 기각했다.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불법 체포된 뒤 집단 학살된 피해자 유족도 명예회복을 위해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여순사건 당시 승주군 서면 동산국민학교 교사였던 이성의 씨는 학교에 출근했다가 직장 세포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군경에 의해 체포됐고 광주호남계엄지구는 군법회의를 열고 이 씨에 대해 포고령 위반죄로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후 이 씨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6월 30일 군경에 의해 적법 절차 없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집단살해 됐고, 이는 순천경찰서의 보안기록 조회회보서에 기록됐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형사1부는 이달 19일 여순사건 당시 내란죄와 포고령 위반 등으로 군경에 의해 희생된 박창래, 이성희 씨 등 민간인 희생자 4명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처럼 여순사건이 발발한지 75년이 지났지만 사건 당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 유족들은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법정 문을 두드리고 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철도기관사로 일하면서 여수 14연대 군인들이 순천에 도착한 후 이들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체포돼 22일 만에 처형된 장환봉 씨.
장 씨의 딸 장경자(78) 씨는 2011년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겠다며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7년여 만인 2018년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2020년 1월 여순사건과 관련한 첫 재심 무죄 판결로 기록된 장환봉 씨의 사례는 사건 발발 후 첫 사법적 절차를 통한 명예회복으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의 불을 당겼다.
9년이 넘는 법정 다툼 끝에 아버지의 무죄 판결을 받아낸 장경자 씨는 지난해 순천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만학도가 된 장 씨는 "재심 과정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자료와 기록, 증거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역사를 공부해서 여순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학교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장 씨는 지금 재심에 나서는 다른 유족들의 소송을 돕고 있다. 장 씨는 "여순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다른 분들도 무죄를 받으면 내 아버지가 무죄를 받은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면서 "재심 과정은 법정에 관련 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장환봉 씨의 재심 무죄 판결은 다른 유족들의 재심에 마중물이 되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법원에 의해 여순 당시 학살된 철도원 66명 명단이 드러났고 여순사건 당시 행방불명됐던 김영기의 재심 재판 계기가 됐다.
여순사건이 벌어진 1948년 10월 순천역 철도원이었던 김영기(당시 23세) 씨는 동료와 함께 진압군에 영장도 없이 체포돼 내란죄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 씨는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마포형무소로 이감된 뒤 한국전쟁이 터진 후 행방불명됐다.
김 씨의 아들 김규찬(74) 씨는 재판부에 재심을 신청했고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지난 2021년 6월 김 씨에 대한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순천역에서 만난 김 씨는 아버지가 거주했던 관사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아버지의 행적이지만 재심 공판 과정에서 이를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김 씨는 "재판 과정에서 김 씨는 실제 나이보다 호적상 나이가 2살 어린 탓에 친자가 맞는지 의심받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함께 학교를 다녔던 동창과 친족들의 보증을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순 유족들은 개별적으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원에 재심을 신청해 명예회복에 나서고 있다.
법원에 의해 어렵게 재심 개시가 이뤄지더라도 재심도 재판이다보니 유족들은 관련 증언 확보, 기록 찾기 등을 통해 '억울함'을 입증해야 한다.
여순 관련 재심 사건 8건을 변호하고 있는 서희원 변호사는 "국가기록원에 기록이 남아 있거나 군사법원이 기록을 남겨 놓은 경우는 오히려 행운이라고 봐야한다"면서 "아무런 기록도 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은 재심의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 여순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제주4·3사건에 적용된 검찰의 직권재심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장환봉 씨의 재심을 맡았던 김정아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하며 "법원에서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재판을 통해서 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세월의 경과, 관련 기록의 멸실 또는 부존재, 관련자들에 대한 진술 내용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지난한 과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위와 같은 절차를 거친 이후에야 유죄의 확정판결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두고 과거사정리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국가의 의무를 다하는 조치라고 생각할 수 없다"며 "여순사건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회복 등을 위하여 하루빨리 특별법이 제정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서희원 변호사는 "현재의 여순 특별법은 제주4.3 특별법과 달리 직권재심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서 특별법 개정 필요성을 언급하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입증된 희생자들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인 정보공개로 유족들의 재심을 돕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