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조원에 이르는 정부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한국벤처투자의 부대표 자리에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아온 인사가 임명돼 '블랙리스트 낙하산' 논란이 일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의혹에 휩싸였던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최근 윤석열 정부 문체부 장관으로 재기용된 것과 겹치면서 '블랙리스트가 되살아 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19일 더불어민주당 이동주 의원실과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신상한 전 SH필름 대표가 지난달 22일 한국벤처투자 부대표에 임명됐다.
한국벤처투자 부대표는 이번에 신설된 자리로, 유웅환 대표와 함께 모태펀드 운영을 총괄하게 된다.
모태펀드는 정부 부처 등이 출자한 자금으로 조성돼 국가 전략 산업, 신산업, 중소벤처업계, 문화예술계 등에 투자된다.
투자 규모가 크고 민간 투자를 유인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 때문에 '투자업계 큰손'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런 모태펀드의 운용을 총괄적으로 관리감독하는 것이 한국벤처투자 부대표의 역할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 임명된 신 부대표가 지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벤처투자 상근 전문위원으로 있으면서 영화계에 대한 모태펀드 투자를 편파적으로 진행했다는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아 왔다는 점이다.
이동주 의원실은 "과거 박근혜 정부에서 친정부적 영화를 선별해 모태펀드를 투자했다는 의혹이 일어났고, 그 중심에 신 부대표가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19년 2월 발간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는 신 부대표가 한국벤처투자 상근 전문위원으로 영입되면서 "모태펀드가 벤처캐피탈을 대상으로 정부 의중을 담은 '코멘트'를 전달하는 등 운용에 간섭했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밝혔다.
또한 한 벤처캐피탈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신 전문위원이 특정 영화를 지목하며 투자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취지로 얘기했다. 과거 사회 비판적 영화를 찍거나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등의 납득하기 힘든 (투자 배제) 이유를 들었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국벤처투자는 "내년 문화예술계 예산이 증액될 것으로 예상돼 신 부대표를 채용한 것"이라며 "채용 절차를 모두 적법하게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채용 절차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연스럽지 못한 지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부대표는 대표의 추천과 주무부처인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승인, 주주총회 결의, 이사회 의결 등 4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쳐 임명된다.
신 부대표는 이 모든 절차를 거치기는 했지만 4단계에 이르는 절차가 단 이틀만에 속전속결로 치러졌다.
지난 9월 21일 유웅환 대표가 신 부대표를 이영 중기부 장관에게 추천했고 같은 날 이 장관은 이를 승인했다.
다음날인 22일에는 올해 10차 이사회를 열어 주주총회 소집과 주총 안건으로 신 부대표 선임 건을 의결했다. 이어 곧바로 주총을 열어 신 부대표 선임 안건을 처리했다. 그리고는 11차 이사회를 열어 주총에서 결의한 신 부대표 선임 건을 의결했다.
한국벤처투자가 주총과 두 번의 이사회를 모두 같은 날 한 자리에서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세 회의 모두 서면으로 진행됐다.
대표의 추천과 중기부 장관의 승인 단계도 불투명하다. 이동주 의원 측은 "9월 21일 당시 중기부 장관은 핀란드와 덴마크에 출장중이었다"며 "추천과 승인 관련 문서를 요구했지만 '모두 구두로 진행해 관련 문서는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CBS노컷뉴스도 부대표 채용과 관련해 사전 공고가 있었는지와 유 대표가 신 부대표를 추천하게 된 경위와 절차 등을 한국벤처투자에 물었으나 답변이 없었다.
한국벤처투자 부대표 자리는 당초 상근 사내이사 자리였었다. 올해 1월 중기부 출신 인사가 왔었지만 5개월 만에 '의원 면직' 형태로 물러났다. 임기를 무려 2년 7개월이나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후 중기부 출신 인사가 다시 올 것이라는 언론보도도 있었지만 최근까지도 비어 있었다.
그러다 신 부대표가 이처럼 일사천리로 임명되면서 모태펀드가 윤석열 정부의 '이념 코드'에 맞춰 차별적으로 운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