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마다 필터갈던 녹물 아파트…이젠 "수돗물 마셔볼까"

서울시 노후 급수관 교체 지원 사업에…확 바뀐 아파트 주민의 삶

교체 된 수도 급수관. 장규석 기자

수돗물이 깨끗하면 뭐합니까. 아파트로 들어오면 녹물이 되는데…박광렬(53) 씨는 아파트 입주민대표회장이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지 31년이 지났다.

"새하얀 필터가 금방 벌겋게 되더니 2주 정도 되면 거의 까맣게 되는 겁니다."

박 씨 가족에게 정수기는 필수였고, 주방 싱크대, 세면대, 샤워꼭지에도 필터를 끼웠다. 2주에 한번 필터를 갈았다. 필터 30개 들이 한 박스를 사놔도 금방 다시 주문하는 것이 박 씨를 비롯한 아파트 주민들의 일상이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도 고역이었다. 지난 2021년부터 아파트 관리를 맡고 있는 곽기한(67) 소장은 "부임하자마자 민원 대장을 펼쳐보니 아파트 주민 민원 대부분이 '급수관계'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녹물 민원이었다.

옥상 저수조에 모인 수돗물이 각 가정에 공급되는 방식이었는데 물탱크 청소를 하고 난 뒤에는 특히나 녹물 민원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수도배관이 오래되고 녹이 슬어 누수가 일어나고 일부 구간에서는 터지기 일쑤였다. 김해철(80) 아파트 노인회장은 "지하실에 수도가 터져서 경비원들이 펌프로 물을 빼내고 그런 고생들을 했다"면서 "해마다 파이프를 타고 물이 새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소장님이나 동대표, 회장을 닦달했다"고 미안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1992년에 준공된 이 아파트의 수도배관은 '백관' 즉 아연도금 강관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연으로 도금해 녹이 덜 슨다는 이유로 수도관으로 주로 사용하던 배관이었다. 1994년부터는 급수관으로 사용이 금지되고, 스테인레스 강관을 사용하는 쪽으로 건축기법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15년 수명의 백관을 그 2배가 넘는 31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교체하지 못했다.


장기수선충당금을 모았지만 591세대로 구성된 아파트가 수억원의 공사비를 부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건축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혹시라도 점수가 깎일까 걱정하는 입주민도 있었다. 그러나 녹물 걱정에, 배관 누수에, 더이상 이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쪽으로 여론이 모아졌다.

곧바로 아파트는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노후 급수관 교체공사비 지원 사업'에 눈을 돌렸다. 오래된 주택에서도 깨끗한 수돗물을 마실 수 있도록 2007년 1기 오세훈 시장 재임 시절 전국 지자체 최초로 시작한 사업으로 지난해까지 누적으로 50만6천 가구에 2천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백관 사용이 금지된 1994년 4월 이전에 건축된 주택이 대상으로 공사비의 최대 80%까지 지원되는데, 단독주택은 최대 150만원, 다가구는 최대 500만원, 아파트의 경우는 세대당 최대 140만원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120다산콜센터 또는 상수도본부 산하 해당 지역 수도사업소에 신청하면 된다.

박 회장이 사는 아파트는 지난해 지원을 신청했지만, 너무 늦게 신청해 사업예산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여서 한차례 고배를 마셨다. 올해는 미리 준비를 했다가 1월이 되자마자 지원을 신청했고, 급수관 상태 등을 사전 점검한 결과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공사는 2월 말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배수관을 열어본 주민들은 아연실색했다. 배수펌프가 벌겋게 녹이 슬었고 배관 안쪽은 녹 찌꺼기가 가득차 있었기 때문. 박 회장은 "단톡방에 누가 사진을 올렸는데 주민들이 다들 '우리가 이런 물을 먹고 살았나' 하면서 경악했다"고 말했다.

한달 반 정도 지난 4월 25일 공사는 끝이 났다. 총 공사비로 6억원(부가세 별도)이 조금 더 들었는데 서울시에서 세대당 40만원씩 2억3640만원을 지원받았다. 곽 소장은 "서울시 지원이 없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라고 말했다.

급수관 교체 공사 이후 아파트 주민들을 괴롭히던 녹물은 사라졌다. 공사를 하면서 급수 방식도 물탱크 방식에서 직수 방식으로 바꾸면서 고층부에서 발생했던 약한 수압 문제도 해결됐다. 물탱크 청소 때마다 탁한 물이 나오던 것도 이제 옛날 일이 됐다.

구로현대아파트 외벽에 붙은 현수막. 장규석 기자

깨끗한 스테인레스 배관으로 바뀐 구로현대아파트 외벽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나붙었다. "급수배관 전면교체" 주변에 자랑할 만큼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았다는 방증이다.  

지난 12일에는 곽 회장의 집에서 '아리수 품질확인제' 검사도 진행됐다.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120 다산콜센터에 전화하면 주말을 포함해 원하는 날에 수돗물 수질을 직접 검사받을 수 있다.

수질검사는 PH와 탁도, 잔류염소 농도, 철, 구리 농도를 검사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싱크대에서 바로 물을 받아 각 농도를 검사하는 기계에 시약과 함께 투입했다. 곽 대표는 급수관 교체 공사 이후 5개월 넘게 필터를 한 번도 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싱크대에서 받은 수돗물의 PH는 7.3(기준치 5.8~8.5), 탁도는 0.12NUT(기준치 0.5NUT 이하), 염소는 0.03mg/L(기준치 0.1mg/L 이상), 철은 0.02mg/L(기준치 0.3mg/L 이하), 구리는 0.05mg/L(기준치 1.0mg/L 이하)가 나왔다.

박 씨의 집 싱크대 수돗물은 PH나 탁도, 철, 구리 등에서 검출치가 생수와 거의 동일했다. 다만 수돗물 냄새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잔류염소는 외려 기준치 아래로 나왔는데 이는 관말, 즉 수돗물이 최종 도달하는 지점이라 염소가 거의 날아가서 그럴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리수 품질확인제'를 통한 수돗물 수질검사 장면. 장규석 기자

생수와 같은 수질의 물이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곧바로 나오고 있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박 회장은 "차나 커피를 끓일 때 수돗물을 받아 바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앞으로 그냥 수돗물을 마셔보기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 상수도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급수관 교체 768개 가구의 수돗물 음용률은 교체 전 16.6%에서 교체 후 31.1%로 14.5%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수돗물인 아리수를 마시면 생수로 발생하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일 수 있고, 생수병에 함유된 미세플라스틱을 먹을 걱정도 없다. 또 탄소발생을 줄이는데도 도움이 된다. 서울시에 따르면 2L 기준으로, 수돗물은 0.338g, 정수기는 501g, 먹는 샘물은 238g의 탄소를 발생시킨다. 탄소발생량이 정수기보다 1482배, 먹는 샘물보다는 704배 적다.

서울시 상수도본부는 올해 85억원을 투입해 1만4천가구의 노후 급수관을 교체할 예정이며, 이를 위해 올 4분기에도 4천여가구 이상에 급수관 교체를 추진 중이다. 나머지 4만5천여 가구에 대해서도 2025년까지 급수관 교체 지원사업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