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공사는 올해 배전공사 관련 감리업체들을 대상으로 사상 첫 전수점검을 실시한 결과 4곳 중 1곳 꼴로 부적정 업체로 적발됐다. 하지만 솜방망이 처벌만 내려져 제도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한전, 올해 첫 감리업체 전수점검…부적정 업체 38곳 적발하고도 벌점에 그쳐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발맞춰 한전은 배전공사 감리업체를 대상으로 사상 첫 전수점검을 진행했다.
한전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이수진(서울 동작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말 입찰해 지난해 착수된 배전공사 기준으로 전체 감리용역업체 145곳 중 38곳(26%)이 부적정 업체로 적발됐다.
15개 한전 지역본부 중 서울본부와 제주본부 2곳만 제외한 13개 지역본부 관할 지역에서 부적정 업체를 적발했다. 해당 업체들이 부적정한 방식으로 수행한 용역은 총 129건으로, 용역비는 13억 원이 넘었다.
부적정 업체로 적발된 감리업체가 받아 간 용역비는 경북 지역이 4억 2524만 2926원(업체 4곳, 39건)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경북의 A감리업체 한 곳에서만 부적정 감리용역 28건(22%)이 적발됐다. 해당 업체가 받은 감리비는 총 3억 1659만 8881원이다.
부적정 업체에 지급된 감리비가 1억 원이 넘는 지역은 △강원 1억 3407만 5442원(3곳, 12건) △대구 1억 3354만 3374원(4곳, 14건) △경기 1억 2882만 6199원(4곳, 11건) △광주·전남 1억 2244만 8620원(4곳, 12건)이었다.
이어서 △전북 9856만 9875원(2곳, 8건) △부산·울산 8242만 3266원(4곳, 9건) △인천 6953만 3952원(3곳, 5건) △남서울 5210만 7213원(2곳, 5건) △대전·세종·충남 4407만 8812원(4곳, 6건) △경남 3887만 6437원(2곳, 4건) △경기북부 3301만 2967원(2곳, 3건) △충북 735만 8128원(1곳, 1건) 순으로 부적정하게 받아 간 감리비가 많았다.
한전이 부적정 업체로 적발한 사유는 △감리원 무단교체 81건(63%) △감리원 배치기간 불일치 30건(23%) △감리원 불일치 18건(14%)이 있었다. 한전은 이 가운데 감리원을 무단교체한 경우 감리업체와 감리원 모두에게 벌점 3점을 부과했다.
배치신고된 감리원과 실제 일한 감리원이 다르거나 신고한 배치기간이 아닌 다른 날 감리용역을 수행한 경우에는 감리업체에 벌점 2점을 부과했다. 이 벌점은 향후 한전이 감리용역 적격심사에서 평가할 때 감점으로 적용된다.
이에 대해 감리업계는 사정을 뻔히 아는 한전이 느닷없이 감사에 나섰다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국전기감리협의회 관계자는 "관례처럼 승인해 줬던 사항들인데 갑자기 조사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최종 승인은 한전이 했는데 왜 업체를 문책하느냐"고 반발했다.
이어 "한전 공사는 중지와 재착공이 너무 잦은데 책임감리원을 교체하려면 사실상 공사가 2개월 이상 중지될 때에나 가능하다"며 "책임감리원을 한 현장에 묶어놔야 하니 한 업체당 감리원이 수십명씩 필요한 상황이어서 한전에서도 승인해줬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3 배전공사 감리용역 협력회사 업무처리 기준'에 따르면 상주감리원 1명을 2개 이상 공사에 중복해 배치할 수 없고, 최초 배치신고한 감리원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용역 사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치돼야 한다. 또 산업부 고시에 따르면 상주 책임감리원을 너무 자주 교체하면 이후 입찰에서 감점 요소가 된다. 다만 공사중지기간 2개월을 넘어야만 감점 없이 교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한전 관계자는 "업체가 편의상 제대로 신고하지 않고 바꾼 걸로 볼 수 있지만, 법과 원칙이 있다"며 "이를 방치해 원칙이 하나씩 무너지게 되면 바늘구멍이 나중에 큰 구멍이 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또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현장 안전관리 강화 차원에서 올해 처음 전수점검을 실시했다"며 "현장에서 점검하는 이가 감리원이고, 안전에 중점을 두고 운영하겠다는 점을 업체들에 주의·환기 시키고자 했다"고 전수점검 취지를 설명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한전 '감리원 안전관리 역할' 강조…모니터링 강화 필요
하지만 한전은 정작 찾아낸 부적정 업체에 대해 단순히 벌점을 부과해 이후 입찰에 불이익을 주는 선에서 그쳤다. 한전은 적발 사례 대부분이 단순히 감리원 변경을 제때 신고하지 않았을 뿐, 실제 기술지도·안전관리 등 용역업무 이행에는 큰 문제가 없어 '계약 해지 사유'까지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한전의 업무처리 기준에서 계약 해지할 수 있는 제재 기준을 살펴보면 △상주감리원 무단교체 또는 미상주(2회) △상주감리원 무단이탈(5회) △상주감리원 중복배치(5회) △시공회사 무단작업 묵인(5회) △감리업무 소홀로 안전사고 발생(사망 1명, 부상 누계 3명) △특별한 사유 없이 준공검사 지연 처리(10회) △감리인원 및 장비 등 확보 기준 부적격(2회) 등이 꼽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수준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들 업체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현행 전력기술관리법은 감리원의 배치기준에 따라 감리원을 배치하지 않은 감리업체에 대해선 200만원 이하, 감리원 배치·변경 현황 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는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전은 처벌은 지방자치단체 소관이고, 지자체에 행정처분을 요청하는 것도 한국전기기술인협회의 몫이라고 책임을 넘겼다. 하지만 한전은 이번 점검으로 적발한 부적정 업체를 내부 시스템에만 반영했을 뿐, 정작 협회에는 따로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등으로 안전에 대한 사회적 요구수준이 높아진 마당에, 이번 전수점검을 통해 4곳 중 1곳 꼴로 감리원을 부적정 배치한 사실까지 드러난 만큼 점검 결과를 토대로 부실감리업체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전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에 따라 2020년 6월 '배전공사 감리업무 수행기준(업무기준)'에서 안전관리기준을 신설해 배전 감리원의 현장 안전관리 권한 책임을 강화했는데, 그만큼 책임과 감시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충북대학교 원정훈 안전공학과 교수는 "주로 소규모 공사현장에서 작업자끼리 작업하다가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한다"며 "감리원들도 위험작업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확인해야 한다. 사고가 나서 형사 처벌할 때 보통 시공사 현장소장과 공사감독 등 책임자 다음으로 상주 책임감리원에게 책임을 묻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원 교수는 "현장에서 시공사가 불법행위를 하면 이를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은 감리원밖에 없다"며 "감리원이 현장 확인 등 안전관리만 잘해줘도 사고를 많이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10년간 배전공사 산재 사망사고 현황을 살펴보면 △2014년 1건 △2015년 3건 △2016년 5건 △2017년 5건 △2018년 5건 △2019년 3건 △2020년 1건 △2021년 9건 △2022년 2건 △2023년 1월~9월 2건 등 총 36건으로 집계됐다.
재해유형별로는 감전이 13건(36%)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떨어짐 9건 △부딪힘 5건 △끼임 4건 △깔림 3건 △맞음 2건 순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한국전기기술인협회 관계자는 "발주처 소속 공사감독관을 현장에 내보내 감독하려면 시공사 인원의 2~3배 이상 인력이 필요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시공사는 하도급·재하도급의 작은 회사가 많아 설계도서를 기반으로 작업할 수 있는 기술 인력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한전이 감리용역을 통해 기술지도하고 관리감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예를 들어 부하계산을 해서 2.5스퀘어(sq) 굵기의 전선 정도는 돼야 허용 전류로서 인정되는데, 시공사가 1.6sq를 깔아 다 매설한 다음 전기를 틀면 절연으로 화재가 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수진 의원은 "배전공사는 고압 전력을 다뤄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은 만큼 한전은 감리업무가 제대로 수행되는지 철저히 관리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하고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