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남자 축구, 야구와 함께 한국 선수단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 안세영(21·삼성생명). 지난 7일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에서 천위페이(25·중국)를 2 대 1(21-18 17-21 21-8)로 꺾고 값진 금메달을 따냈다.
무엇보다 경기 중 심각한 부상을 이겨내고 거둔 우승이기에 더 값졌다. 안세영은 1세트 18 대 16으로 앞선 가운데 천위페이의 공격을 받다가 오른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치료를 받는 내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안세영은 1세트를 따냈지만 2세트를 내주며 위기에 몰렸다.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어머니가 울면서 "세영아, 그냥 기권해!"라고 소리쳤을 정도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안세영은 그러나 3세트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다. 부상이 정말일까 의심이 들 만큼 몸을 던지는 특유의 철벽 방어까지 선보인 안세영은 상대의 거짓말 같은 부활에 질린 천위페이를 압도했다.
경기 후 안세영은 "무릎에서 '딱' 소리가 나서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고, 결국 병원 검진에서 무릎 부근 힘줄이 끊어져 2~5주 재활 소견을 받았다. 이런 부상에도 안세영은 불굴의 투혼으로 역경을 이겨낸 것이다.
특히 '천적'을 완벽하게 꺾으면서 진정한 배드민턴 여왕으로 우뚝 섰다. 안세영은 지난 1일 여자 단체전에 이어 개인전 결승에서도 천위페이를 제압했다. 항저우 출신 천위페이의 고향에서만 2패를 안겼다.
안세영은 천위페이와 악연이 깊다. 5년 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 안세영은 1회전에서 광탈했는데 당시 상대가 천위페이였다. 3년이 지나 도쿄올림픽 8강전에서도 패배를 안는 등 지난해까지 1승 8패의 절대 열세를 보였다.
물론 안세영은 5살 위인 야마구치 아카네(일본), 허빙자오(중국)에도 지난해까지 각각 5승 10패, 4패로 밀렸다. 그러나 큰 대회에서 유독 천위페이에 일격을 당했다. 무엇보다 안세영은 천위페이에 가장 긴 7연패를 당할 만큼 고전했다.
하지만 그런 안세영을 일으킨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 이현희 씨(48)다. 천위페이에 좌절했던 딸을 따뜻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마인드로 위로하고 격려했고, 결국 안세영은 천적을 넘을 수 있다.
딸의 아시안게임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이 씨는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세영이가 7번 연속 졌을 때 '엄마, 진짜 천위페이는 왜 이렇게 계속 만나는데 안 될까'라고 한 적이 있다"고 돌아봤다. 이어 "물론 세영이가 어릴 때 국가대표가 되면서 처음 그 선수들(천위페이, 야마구치, 허빙자오)과 경기에서는 못했지만 유독 천위페이에게는 힘들어 했다"고 덧붙였다. 안세영은 광주체중 3학년이던 2017년 1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최연소, 이용대(35·요넥스) 이후 2번째로 중학생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다.
낙담한 딸을 달랜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 씨는 "언제 천위페이가, 세계 1위가 스파링 뛰듯이 훈련해주겠니?"라고 물으며 "10번 찍어 안 넘어간다는 나무 없다는데 이렇게 천위페이를 만날 때는 너한테 분명히 훈련할 기회를 주는 것 같다"고 생각의 전환을 유도했다고 한다. 이어 "앞으로 계속 만나야 할 선수니까 방법을 찾을 수 있게끔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고 찾아가 보자 얘기했다"고 덧붙였다.
엄마의 위로가 힐링이 된 걸까. 마침내 안세영은 지난해 7월 천적을 넘어섰다. 7전 8기 끝에 '2022 말레이시아 마스터즈' 단식 결승에서 2 대 0 완승을 거뒀다. 이 씨는 "세영이가 정말 10번 찍기 전에 7전 8기로 하더라고요"라면서 "승리 이후 '세영아, 네가 그래서 대단한 것 같다. 마음 먹는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닌데 방법을 찾고 체력을 커버하고 스스로 이겨냈다'고 칭찬해줬다"고 미소를 지었다.
이후 천적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안세영은 올해 9번의 대결에서 천위페이를 7번이나 눌렀다. 상대 전적은 여전히 8승 10패지만 역전은 시간 문제다. 안세영은 체력과 기량에서 절정에 접어들고 있고, 천위페이는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하향세다.
이제는 다른 선수들과도 열세에서 점점 우세로 돌아서고 있다. 안세영은 올해 야마구치에 3승 2패로 앞서 8승 12패로 만회했고, 허빙자오는 이번 대회 4강전을 포함해 6승 4패가 됐다.
이 씨는 "상대 선수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가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 같다"면서 "마음이 크게 된 것 같다"고 짚었다. 이어 "누구를 이겨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게임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깨달은 거 같아서 이제는 믿고 보게 되는 거 같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안세영은 이제 한국 배드민턴 전설 반열에 올랐다. 올해 여자 단식 레전드 방수현의 길을 이었거나 방수현도 걷지 못한 길을 뚫었다. 방수현 이후 27년 만에 전영 오픈 우승, 여자 단식 세계 랭킹 1위 등극과 29년 만의 아시안게임 단식 금메달, 단체전까지 2관왕 달성 등이다.
특히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개인)에서는 방수현도 이루지 못한 한국 선수 최초의 단식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 씨는 "시상식 때 태극기가 올라가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오니까 이래서 애국자가 되는구나 느꼈다"면서 "정말 세계적인 선수가 됐구나 해서 감동적이었다"고 돌아봤다.
사실 안세영 전설의 시작도 부모님에게서 비롯됐다. 아버지 안정현 씨(54)는 "내가 원래 운동(복싱, 소프트테니스)을 해서 자식은 안 시킬 생각이었다"면서 "그런데 아내와 함께 배드민턴 동호회를 하면서 애들도 자연스럽게 라켓과 접하게 됐다"면서 "저녁에 동호회 가면 데리고 가서 놀고 하다 보니 레슨해주던 엘리트 코치가 '운동시켜도 괜찮다'고 해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 씨는 1994년 복싱 국가대표로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 출전했는데 메달은 따지 못했다. 안 씨는 "딸이 29년 만에 아버지의 아쉬움을 풀어줬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올해 세영이가 집에 거의 한번도 못 왔는데 코트에서 '안세영' 하고 부르면 손 한번 흔들어주는데 그거에 만족한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부부는 결승 당시 딸의 부상에 크게 놀랐다. 경기 후 "걱정이 돼서 눈물이 펑펑 났다"는 이 씨는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져 있었다. 함께 응원하던 안세영의 소속팀 삼성생명 관계자는 "당시 부모님께서 놀라 거의 주저 앉으셨다"면서 "원래 우렁차게 응원하시는 분들인데 부상 이후 제대로 못 하셨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딸은 씩씩하게 이겨냈고, 한국 배드민턴의 역사에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부부는 "세영이가 정말 잘 이겨내고 금메달까지 따내서 정말 자랑스럽고 흐뭇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 배드민턴의 전설은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