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에 대한 후폭풍이 몇달 째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IMF 때도 줄어들 지 않았던 R&D 예산 삭감을 두고 과학계의 원로들이 나서고 있고, 기초과학단체들이 연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꺼지지 않는 비판 여론에 정부도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최근 언론에 R&D 예산 재검토설이 나오자 정부는 즉각 부인했지만,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예산 일부 재조정에는 대비하는 모양새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급하게 뒤집었다? 예산 검토 세밀했나 관건
R&D 연구 예산 삭감 과정에서 과학계의 반발을 사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삭감 절차가 급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발단이 됐다. 윤 대통령은 6월28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R&D 예산 삭감을 언급했다. 다음 날인 6월29일에 감사원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비롯한 11개 기관에 감사관을 보내 실지감사를 실시했다.
대통령이 발언한 때는 R&D 예산 법정심의 기한을 불과 이틀 남긴 시점이었다. '과학기술기본법' 제12조의2 5항에 따르면, 과기부는 R&D 사업에 대한 목표, 추진방향, 사업별 투자우선순위, 예산 배분과 조정, 부처별 역할 분담 등을 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를 거쳐 매년 6월 30일까지 기획재정부에 알리도록 돼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 탓인지 과기부는 올 해 R&D 예산안 제출기한을 처음으로 넘기게 됐다. 당시에 각 연구 단체들에는 하루이틀만에 성과와 구조조정 계획을 정리해 보고하라는 등의 급박한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결국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지 두 달 만인 8월22일 과기부는 내년도 '주요 R&D 예산'을 전년 대비 3조4500억원 삭감한 21조5000억원으로 편성했다고 발표했다. 8월29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내년도 전체 예산안에서도 R&D 예산은 대폭 삭감된 채 발표됐다.
과학계에서는 R&D 예산 삭감이 졸속으로 이뤄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지난 4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이종호 과기부 장관을 상대로 실정법을 어기고, 법정심의를 넘기게 된 경위에 대해 야당 의원들의 집중 추궁이 이뤄졌다. 당초 1월부터 과학기술자문회의의 심도있는 논의를 거쳐 정해져야 할 R&D 예산이 대통령의 한 마디에 뒤집어 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번 국정감사와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지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경제대변인은 CBS와의 통화에서 "R&D예산 삭감 과정에 과연 세밀한 검토가 이뤄졌는지 의심된다"며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성급하게 예산 삭감을 결정했다는 의혹이 있는 만큼 사업 하나하나를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국민 설득 실패에 정부도 고민 깊어…국회에서 바뀔까
벌써 몇 달 째 꺼지지 않는 R&D 예산 삭감에 대한 비판 여론에 정부 내에서도 고민이 깊어지는 분위기다.
특히 R&D 예산이 가지는 상징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도 나온다. R&D 예산의 경우 IMF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 때에도 줄이지 않은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라는 대국민의 인식이 강한데, 이를 간과하고 예산 삭감의 논리를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정부로서는 뼈 아픈 지점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관계자는 "R&D 예산이 최근 몇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것도 맞고, 일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야당에서도 일부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라며 "하지만 예산 삭감이 충분한 현장 검토 없이 성급히 이뤄졌고 지원 시스템도 개선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분위기 때문인지 최근에는 대통령실과 여당에서 R&D 예산 삭감을 일부 재검토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대통령실과 기재부에서는 이를 즉각 부인했지만, 이같은 재검토설이 도는 것은 정부 내부의 고민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방증한다.
정부도 국회의 내년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 일부 조정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정부안을 재검토할 분위기까지는 아니지만, 어차피 내년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 세부적인 부분에 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며 "과학계의 여러 의견들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 반영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과학기술계의 연대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원로들도 적극 나서고 있어 정부의 부담은 커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