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간 '무덤'이 세계가 인정한 '역사'가 됐다

기록 없는 600년 가야사, 땅속 무덤 '고분군' 통해 가야의 삶 조명
삼국사에 비해 홀대 가야사, 文 정부 국정과제 채택 이후 연구조사 활발
명실상부 가야사 중심지 경남, 유적지 약 70% 보유 '비지정 유적 발굴 집중'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기념식 예정 尹 대통령 초청

합천 옥전 고분군(사적 제326호)이다. 강과 낙동강을 이용한 내륙교통 중심지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4~6세기 무렵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수는 1천여 기에 이른다. 경남도청 제공

죽음의 공간인 '무덤'이 역사로 기록돼 '고대 왕국'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강력한 삼국 위주의 고대사 연구에서 소외되고 잊힌 경남의 뿌리인 가야가 전설 속에 떠돌다가 그 죽음의 공간에 담긴 유물로 세상에 알려졌고, 그 진가를 뽐내고 있다.

단편적인 기록 말고는 제대로 된 역사서가 없기 때문이다. 가야에 의한, 가야를 위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없다. 이렇다 보니 한국사에서도 가야는 삼국에 묶여 작은 소국으로 홀대받았다. 고대 왕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탓이다.

"가야가 1세기부터 6세기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존속했지만 한반도 끝에 있는 아주 자그마한 나라, 그 정도로 알려져 있었고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보니까 신비의 나라, 그 정도로 실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가 가야 문명이, 가야가 남겼던 유산과 유적이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많이 발견돼서 그때부터 가야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1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하승철 실장)

하지만, 가야 역사는 600년에 이른다. 조선왕조 500년보다 더 긴 역사를 가졌다. 고려도 450년이다. 가야 역사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발굴된 유물은 가야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죽은 자의 무덤에는 가야의 성립과 발전, 소멸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역사는 기록으로 살아난다. 가야사의 역사를 다시 쓰고 복원하는 데 중요한 정보다. 이 무덤이 가야의 '역사서'이자, '증거'로, 가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제341호)이다. 이곳은 김해만을 배경으로 조성된 한‧중‧일 해양 교역의 중심지로, 3~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300여 기의 고분이 있다. 경남도청 제공

가야고분군은 다른 나라와 통합하지 않은, 연맹 체제의 독창적인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 왕묘의 출현과 고분군의 군집·위계화는 가야의 계층적 구조를, 묘제의 도입과 변화는 사회 구조의 변화를 보여준다. 무덤이 가야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부장 유물은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과 생활상을 알려준다. 출토된 교역품을 보면 인근 신라와 백제, 그리고 일본, 중국, 머나먼 서역까지 교류가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 가야고분군 중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처음으로 중국 남조시대의 연꽃무늬 최고급 청자그릇에 이어 고대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로만글라스(Roman Glass)가 발견됐다. 가야의 활발한 교역 활동과 교섭 관계를 잘 보여준 사례다.

"가야는 거의 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가야에는 아주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시 아주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여주는 갑옷, 투구 우수한 철기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리고 목걸이, 귀걸이라든지 이런 장신구들이 굉장히 화려한 장신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토기들도 굉장히 조형미가 뛰어나고 아름다운 토기들이 많기 때문에 이게 잘 알려지지 않지만 굉장히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이런 나라였구나, 이런 걸 알 수가 있고 그런 가야의 문화가 중국에서 오는 이런 새로운 기술들을 받아들여서 일본 열도에 전해지면서 동북아시아 전체적으로 고대 문명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평가받고 있습니다."(하승철 실장)

가야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중국 남조시대 최상급 연꽃무늬 청자그릇(좌)이 출토돼 관심을 끌었고, 고대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로만글라스(Roman glass)도 확인됐다. 경남도·함안군청 제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자료(2018년)에 따르면, 전국의 가야유적 2495곳 가운데 67%인 1669곳이 경남에 있다. 가야유적 10곳 중 약 7곳으로, 명실상부한 가야사의 중심지다.

그러나 지정 유적은 91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95%는 모두 비지정 유적이다. 아직 조사나 연구 기회조차 받지 못한 곳이다.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다 보니 개발에 훼손되고, 도굴로 사라지는 유적·유물도 많다.

가야 고분 발굴이 활기를 띤 건 대규모 토목 공사에 따른 발굴 조사가 시작된 1980년대다. 그러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경남의 비지정 유적의 조사·연구는 2018년부터 활발하게 진행됐다. 문재인 전 정부가 국정과제로 채택하면서 사실상 속도가 붙었다. 실제 비지정 유적 중 역사에 기록을 남길 만한 의미 있는 성과도 나왔다.

고성 만림산 토성이 소가야 중심 세력이 축조한 토성의 실체를 규명한 첫 사례로 기록됐고, 통영 유일의 가야 봉토 고분군인 팔천곡 고분은 남해안의 해양세력이 조성한 유적으로 드러났다.

또, 경남의 가야 유적 중 두 번째로 규모가 큰 합천 삼가고분군이 도 문화재로 지정된 지 48년 만인 202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 성과도 올렸다. 학술 가치로 밝히려는 경남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스갯소리로, 파면 나오는 가야사 유물이자, 기록이다.

통영 팔천곡 고분군은 통영시 유일의 가야시대 봉토고분군으로, 남해안의 가야 해양세력이 조성한 유적으로 밝혀졌다. 경남도청 제공

"가야 유적의 95%가 비지정으로, 문헌 자료가 부족한 가야사의 온전한 재조명과 역사적 가치 규명을 위한 학술조사가 시급합니다. 가야유적을 체계적으로 복원·관리하기 위해 국가 문화재 지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학술 가치 규명 목적의 조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유산과)

'가야의 세계화'를 목표로 시작한 가야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가야의 뿌리를 표방한 경남으로서는 큰 성과다.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일궈낸 10여 년 만에 쾌거다.

 17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가야고분군이 우리나라 16번째이자, 경남에서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통도사(2018년), 남계서원(2019년)에 이어 4번째 세계유산으로 확정되자, 150여 개국 대표단으로부터 환호와 축하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이다. 아라가야 지배층의 고분군으로, 탁월한 경관을 갖춘 가야 남부지역 대표 고분군이다. 4~6세기 무렵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200여 기의 고분이 발견됐다. 경남도청 제공

세계유산 등재는 신청 유산이 특정 국가나 민족의 유산을 넘어,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중요한 유산이 된다는 의미다. 7개 고분군 모두 각 가야의 중심지에 위치하며 지배층의 무덤이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조성된, 대표적인 무덤이다. 많은 곳은 고분군이 1천여 기에 달한다.

'현존하거나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유일한 또는 적어도 독보적인 증거'를 충족해 현재와 미래 세대의 전 인류에게 공통으로 중요한 세계유산의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았다.

경남도는 가야고분군을 보존, 활용하고자 가야역사문화권 기반을 조성할 계획이다. 가야고분군의 국제적 브랜드 가치가 높아져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전략으로, 도가 역점적으로 추진 중인 남해안 관광벨트와도 연계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세계유산 특별법'에 따라 보존·관리·활용을 위한 홍보나 공연 등 다양한 사업 추진이 가능해졌다. 그 첫 단추가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기념식이다.

명실상부한 가야의 뿌리를 기반한 지역이 경남인 만큼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박완수 지사는 이달 초 대통령실을 찾아 국토균형발전의 지역 상징인 남해~여수 해저터널 기공식과 연계해 문화강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의미로써 11월쯤 계획 중인 기념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유산회의에 참석한 박완수 지사를 비롯한 경남대표단이 가야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환호했다. 경남도청 제공

가야사의 조사·연구·복원사업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지금까지 조명받지 못했던 가야사 연구 기반이 조성되고,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비지정 유적 발굴에도 관심을 받게 됐다. 삼국과 비교해 인지도가 낮은 가야사를 흥미롭게 이해하도록 널리 알리는 노력도 필요하다.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적으로 가야 문명의 가치를 인정받게 됐습니다. 앞으로 정부와 긴밀히 협력해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잘 보존하고 관리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박완수 경남지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