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괴물' 같은 신인이 등장했다.
유재선 감독은 '잠' 개봉 전부터 데뷔작으로 칸을 다녀왔다는 사실과 봉준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이른바 '봉준호 키드'의 영화인 만큼, '봉준호'라는 이름이 수식어에 붙은 만큼 기대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기대는 환호가 됐다.
봉준호 감독은 '봉준호 키드'의 데뷔를 두고 "신인 감독이 데뷔할 때 여러 허들과 많은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작지만 단단한, 보석 같은 영화'가 나왔다는 느낌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과 함께해 본 경험이 있는 김태완 대표는 과연 유재선 감독에게서 '봉준호'를 발견했을까.
'괴물'로 봉준호 감독과 함께 칸을 방문했던 김 대표는 '잠'으로 봉준호 키드와 다시 찾은 칸에서 그때 그 감정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유 감독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봉 감독의 많은 것을 배웠음을 여러 면에서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유재선 감독이 '봉준호 키드'를 넘어서서 '유재선 감독'만의 색을 낼 날이 금방 올 것 같다고 했다.
'괴물' 때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한 '잠'
▷ 이번에 '잠'을 제작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칸이다. 블라인드 시사나 기술 시사 등도 했지만 아무래도 관객에게 처음 보여주는 거다 보니 반응이나 리뷰가 나올 때 가장 보람 있었다. 그리고 칸을 굉장히 기다리고 기대했던 건, 우리 팀이 작품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가져가야 하는지 가늠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서로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온도가 달랐다면 칸을 통해서 확실히 합일됐다. 마케팅, 배급, 기타 비즈니스를 논의하는 합 자체가 굉장히 좋았다.
▷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전 세계 영화 관계자와 관객들에게 먼저 선보였을 때, 어떤 반응을 통해 '잠'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나?
칸에서 굳이 느꼈다기보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이미 전 세계가 공감하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가 워낙 장르적인 날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해외 세일즈, 특히 리메이크에 있어서도 똑같은 비중을 두고 비즈니스 플랜을 짜야겠다고 생각했다.
▷ 상영 끝나고 난 후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칸의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봉준호 감독님과 '괴물'로 칸에 갔을 때(영화 '괴물'은 2006년 열린 제59회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받았다. 김태완 대표는 당시 '괴물' 제작사 청어람에서 일했다) 되게 감동 받았다. 그때 진짜 기립박수가 막 나오고,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환호성 지르고 하는데 진짜 벅차오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립박수 몇 분이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현장에서 직접 보면 요식 행위가 아니다. 진짜 진심으로 작품을 축하해 주고 좋아해 주는 게 느껴진다. '잠'이 딱 내가 '괴물'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돌아보게 해줬다.
▷ '잠' 상영 후 당시 현지 관계자·관객들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
현지 기자나 평론가들 반응이 정말 다 긍정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한 줄이 있다. 어떤 분이 "'유전'과 '기생충'이 만나 낳은 아기 같은 영화"라는 말을 쓰셨는데, 진짜 이 영화가 그 정도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극찬이었다. 시나리오 때도 느꼈지만 칸에서 영화를 공개한 후 칭찬을 받고 나니 한국을 넘어서 글로벌하게 어필할 수 있는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봉준호 키드' 유재선
▷ 시나리오 때부터 성공을 확신한 '잠'은 어떻게 시작된 작품인지 궁금하다.
유재선 감독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왔다. '옥자' 때 내가 영화 끝나고 단편을 공모하겠다고 공약한 게 있다. 단편이 괜찮고, PD를 데리고 오면 2천만 원씩 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대여섯 편의 단편을 만들었다. 그때 단편 중 하나가 홍의정 감독의 '서식지'다. 그걸 보고 장편을 만들자고 홍 감독과 결의했던 거다. 유 감독은 그때 내지 않았지만, 공약을 기억하고 나중에 장편을 써서 가져온 거다. 유 감독이 봉준호 감독님에게 먼저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봉 감독님이 이걸로 데뷔하라고 이야기하자마자 나한테 가져왔다.
▷ 함께 작업한 유재선 감독은 어떤 강점을 지닌 연출자였나?
유 감독은 되게 정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다. '옥자' 때도 그렇고, '잠'으로 만나기 전에도 내가 간간이 번역이나 통역 알바를 부탁했다. 그때마다 되게 정확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봉 감독님도 극도로 디테일하다는 칭찬의 뜻을 담은 '봉테일'이란 별명이 있는데, 유 감독도 디테일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 정도가 정확하다는 거다.
행동거지도 그런 것 같다. 정확한 양만 말을 하고, 정확한 루트로만 행동반경을 갖고 있다. 집, 일, 집, 일….(웃음) 정확하게 계획돼 있다. 플랜대로 무얼 찍을지를 다 알고 있다는 건 이게 왜 필요한지까지 다 알고 있다는 거다. 그렇기에 어떤 변수가 생겨도 뭘 취하고 뭘 버릴 수 있는지 아는 거다. 그런 유연성이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 봉 감독님 이야기를 하니, 요즘 유재선 감독의 콘티가 유튜브 '넌 감독이었어'를 통해 공개된 후 화제다.
봉 감독님도 콘티로 유명한데, 유 감독도 콘티를 먼저 그려왔더라. 물론 봉 감독님의 그림체에 비해 유 감독의 콘티 그림체가 훨씬 귀엽다. 성격이 드러나는 거 같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호러인데, 빽빽하게 그려서 바인더까지 해 온 콘티를 보니 캐릭터가 너무 귀여운 거다. 물론 어떻게 찍고 카메라를 어떻게 움직일 건지는 알겠는데, 장르와는 안 어울리는 그림체였다.(웃음) 그런데 정말 콘티를 그대로 구현하기 쉽지 않은 게 현장의 현실인데, 유 감독은 어떤 것을 취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무슨 묘기를 부려야 하는지 알고 유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유재선 감독을 두고 '봉준호 키드'라고 부르는데, 봉준호 감독과 작업해 본 입장에서 언제 유재선 감독에게서 봉 감독의 모습을 떠올렸을지 궁금하다.
영화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배운 기회는 '옥자' 현장이 맞는 거 같다. 유재선 감독이 '기생충' 때 샤론 최처럼 봉 감독님의 전담 통역도 했다. 현장에서 전담 통역을 한다는 건 일거수일투족 상대를 다 복사하는 역할인 거다. 그러면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다 배운 거 같다. 어떻게 변수에 대처해야 하는지, 어떠한 디테일을 갖고 배우들과 소통해야 하는지를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선 감독은 스타일이나 장르 취향 등에서 다르다. 봉 감독님은 '봉준호가 장르'라고 말하는 분이 많을 정도로 장르 마스터다. 유 감독도 장르 영화에 대한 취향이 굉장히 각별하다. 가지고 있는 센스가 날카롭다. 자기가 얘기하는 본인의 취향은 '로맨틱 코미디'다. 로맨틱 코미디하고 호러가 되게 아이러니한 조합이잖나.
'잠'에 그게 약간 묻어 있다. 봉준호 감독님이 로맨틱 코미디를 한다는 건 잘 상상이 안 간다. 그래서 그런 면에 있어서 유 감독은 또 다른 궤도에서 이제 마스터급으로 가는 출발점에 서 있지 않나 싶다. 그렇기에 유 감독이 '봉준호 키드'라는 말을 넘어서서 자기만의 다른 색을 보여줄 것 같다.
<제3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