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개입과 재판 거래 등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15일 징역 7년형이 구형됐다.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게는 각각 징역 5년과 4년이 구형됐다.
검찰은 "재판 독립 파괴"라며 피고인들에게 엄벌을 요청한 반면, 피고인들 측에서는 검찰의 기소에 대해 "적폐 프레임으로 밀어붙인 수사"라며 수사 과정에서의 절차적 문제를 집요하게 문제삼았다.
檢 "사법부 목적 위해 재판을 거래 수단으로 삼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부장 이종민 임정택 민소영)는 15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의 결심 공판을 열었다
'사법농단 사건'을 둘러싼 양측의 정의부터 달랐다. 검찰은 법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정부와 재판 거래를 하고 이를 비판한 법원 내부 인사에게 불이익까지 준 '범행'으로 봤다.
검찰은 이날 오전 구형에 앞서 "피고인들은 최고 사법행정권자들로서 강제징용 손배소 피해자인 원고 측을 배제한 채 피고(정부) 측과 함께 해당 재판에 개입했고 상고법원 도입을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압박하기 위해 재판에 개입하기도 했다"고 일갈했다.
또 "통진당 행정소송에 대해 헌법재판소를 압박하고 사법부 정책과 목표를 관철하기 위한 거래 수단으로 삼기로 마음 먹고 재판부에 접촉하고 재판 관여도 서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이들 피고인이 자신의 업무 권한을 벗어나 개별 법관들에게 재판 관련 문건을 작성하게 하는 등의 범행을 저질렀다고도 했다.
검찰은 "법원행정처의 지휘 계통을 통해 보고·승인 과정을 거쳐 의사 결정이 된것으로 이른바 '월권적 남용 형태'로 직권남용이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재판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소송,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관련 행정소송,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 사건 형사재판 등이다.
검찰은 당시 대법원의 역점 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 법관 재외공관 파견 등을 도모하기 위해 청와대·외교부 등의 지원을 받거나 대법원의 위상을 강화하고 헌법재판소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이같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봤다.
'무죄' 주장한 피고인들…'1984' 인용해 文정부 융단폭격
이날 오후부터는 피고인 측의 반격이 시작됐다. 피고인 측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증명력 문제부터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들이 조서도 제대로 열람하지 못한 점 등 '절차적 문제'를 집요하게 따졌다.
양 전 원장 측은 "적법 절차가 준수되는 방법에 의하여만 진실이 드러나고 법관이 (거짓에 가려) 사실 인정을 방해할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대해 너그러이 평가하며 피고인의 주장이 담긴 증거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과 같은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형사 법관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양 전 원장 측에서는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조사를 받은 법관들의 증언을 언급하기도 했다.
양 전 원장 측은 "법관이 (검찰 조사에서) 사실관계를 설명드렸더니 '스탠스를 잘 잡으라'고 검사가 참고인(법관)에게 말했다는 증언, 조사 후 검사가 작성한 진술조서를 보고 진술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아 수정해달라고 했더니 한 부분을 수정하는 데 한시간이 넘게 공방을 벌여서 다음날 재판에 참석할 수 없겠다 싶어 검사 주장대로 도장을 찍고 나왔다는 증인의 말씀도 생각 난다"고 말했다.
공판 과정에서 증거로 쓰인 검찰 측 조서 등의 증명력이 매우 낮다는 취지다.
양 전 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비판 세력을 와해시키려고 하고 대한변호사협회를 길들이려 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추측과 단정뿐'이라며 검찰을 향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
양 전 원장 측은 "단순한 행사 불참만으로 압박하려는 의도로 단정했다"고 말했다.
집권 세력이 달라지면서 사법부 내에서도 권력 이동이 있었고, 사법농단은 그 결과라는 취지의 주장도 나왔다.
변호인들의 최후변론이 끝난 뒤 양 전 원장과 두 전 대법관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전 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양 전 원장은 문 전 대통령이 2018년 9월 법원의날 행사 축사를 놓고 "불분명한 사법농단·재판거래 의혹을 기정사실화하고 사법부 자체 조사를 외면하고 '수사를 더해야 한다'고 했다"고 힐난했다.
특히 이같은 문 전 대통령의 축사에 대해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한 조지 오웰의 '1984'를 인용하면서까지 비판 수위를 한층 끌어올렸다.
양 전 원장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1984' 속) 이 말은 당시 집권 세력의 의도를 명쾌히 설명한다"며 "그들은 사법부의 미래를 장악하기 위해 권력으로 사법부의 과거를 지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이 사법부 장악을 위해 사법농단 수사를 사실상 주문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전직 대법관 역시 무죄를 주장했다.
박 전 대법관은 "사법부의 신뢰에 너무 큰 손상을 입힌 것은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면서도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정부와 교감하면서 비판 세력을 무고하게 억압하는 사법 적폐에 대한 실체가 있는지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 전 대법관은 "일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했을 뿐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직권을 남용한다는 인식을 추호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며 "이 사건은 검사가 과도한 의심과 비약과 추측으로 꾸며낸 시나리오"라고 강조했다.
한편 '사법농단' 1심 재판은 2019년 5월 9일을 시작으로 이날 결심까지 총 277차례 공판이 이어졌다.
재판부는 오는 12월 22일 1심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