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연구개발) 예산 삭감 소식 듣고 '이 공부를 계속 해도 될까'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의약계열로 관심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한정현 카이스트 부총학생회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이공계 학생들의 반응을 전하며 R&D 예산 삭감으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뜩이나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데 정부의 R&D 예산 삭감이 심리적 이탈을 더 가중시키고 있다. 미래 산업의 기초가 될 과학 연구 분야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구원들 아마존, 구글 등 외국 IT 기업으로 빠져나가"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가장 많은 147명이 이탈했고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가 105명, 한국원자력연구원이 88명,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86명, 한국화학연구원이 53명이다.
출연연 과학자들은 준공무원 신분이지만 공무원연금 등 공무원이 누릴 수 있는 각종 복리후생은 적용받지 못한다. 반대로 연봉 인상은 공무원과 동일하게 매년 0.5~1%대에 머물러 있다.
이에 근속연수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직하는 젊은 연구원들이 많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노동조합 제동국 위원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실제로 연구원들이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외국 IT 기업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젊은 연구원들의 유출은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제 위원장은 "중간급(30~40대) 인력이 너무 줄어들어 신입 연구원이 들어오면 까마득한 선배와 일을 하게 된다. 게다가 급여 수준도 낮으니 버티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카이스트 자퇴하고 의대로 가는 학생들
지난 2월 종로학원에 따르면 2018년~2022년 5년간 4대 과학기술원 학생 1006명이 중도 자퇴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총 499명, 울산과학기술원(UNIST)는 263명, 광주과학기술원(GIST) 150명,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94명이다.
종로학원은 이들의 80~90%가 반수·재수를 통해서 의·약학 계열로 이동했다고 추정했다. 과학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영재고도 의대 진학률이 너무 높아 교육 당국이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과학기술 인재 확보가 절박한 현실과 정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과학자들의 낮은 봉급과 열악한 처우 탓이 크다. 제동국 위원장은 "전자통신연구원의 경우 연봉 인상률이 10년째 1.7%대에 머물러있다"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4대 과학기술원 석·박사들이 출연연에 입사하면 초임 연봉으로 4260만 원(2021년 기준)을 받게 된다. 정규직 평균연봉은 9178만원이다. 이에 반해, 의사들의 평균 연봉은 2억 3080만원이다. 학업에 투자한 시간은 비슷한데 연봉은 2~3배 차이가 난다.
과학고 졸업 후 의대에 진학한 임 모 씨(25)는 "학문에 대한 흥미와 열정 때문에 연구원을 꿈꾸는 학생들도 많지만, 박사 학위가 나오는 30대 중반까지 적은 소득으로 대학원 등록금을 내는 게 부담이 돼 의대 진학률이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대학원생 서 모 씨(28)는 "연구실에서 야근까지 하면서 월급 40만 원을 받았다"며 "하한선이 불명확해 많은 학생들이 최저임금보다 못한 돈을 받고 연구실에서 일하기도 한다"고 했다.
"고장난 설비 수리도 못해"…시름 깊어지는 과학계
정부의 R&D 예산 삭감이 이런 이공계 기피 현상을 가속시킬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온다.
과학기술계 노조 관계자는 "국가에 중요한 연구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연구를 해왔는데, 정부가 그 몰입을 방해하고 있다"며 "도서관에서 공부하려고 하는데, 정부가 갑자기 들어와 도서관 불을 다 끄는 격"이라고 했다.
아울러 과학고·과학전문원 학생들의 의대 이탈 배경에 "연구원들이 존중 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날이 갈수록 국가연구개발의 특성과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고 연구개발 관련 예산을 그저 비용으로 치부해버리는 정부의 시선이 연구현장의 사기와 연구 효율성은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제동국 위원장은 "월급을 많이 받고 싶었다면 출연연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유로운 환경에서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 위해 출연연에 왔는데, 정부의 간섭이 갈수록 심해져 정부가 하라는 연구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했다.
천문연구원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과제에서 외부인건비로 포닥(박사후과정)을 계약직으로 뽑아 과제수행을 한다"며 "예산삭감으로 핵심연구과제를 수행하는 포닥의 재계약이 불투명해 과제수행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 3월 KVN 망원경에 설치돼 있는 수소 메이저 시계가 고장 났는데 수리조차 못하는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보수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해외 연구진들과 진행하는 공동 관측 연구에서 밀려날 수도 있어 연구원들의 걱정이 크다.
(※ 이 기사는 13일자로 노컷비즈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