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잠' 관객들 마음에 심어둔 의심, 공포로 싹튼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스포일러 주의
 
94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유재선 감독은 최대한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동시에 독특한 만듦새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음새를 선보인다. 그렇게 '의심'이란 코드를 관객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심어 놓은 감독은 관객 스스로 공포를 만들어 가게끔 하며 미스터리 호러를 완성한다.
 
현수(이선균)와 수진(정유미)의 행복한 신혼 생활은 어느 날 옆에 잠든 남편 현수가 "누가 들어왔어"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거린 후 조금씩 불안하게 변해간다. 그날 이후 현수는 잠들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하지만,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에 수진은 현수가 잠들면 가족들을 해칠까 두려움을 느끼고, 매일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끔찍한 공포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치료도 받아보지만 현수의 수면 중 이상 행동은 점점 더 위험해진다. 수진은 곧 태어날 아이까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갖은 노력을 다해본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첫 장편 데뷔작으로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국제영화제의 부름을 받은 유재선 감독 작품 '잠'은 봉준호 감독의 말마따나 '유니크한 공포'를 선보인다. '봉준호 키드'라는 수식어를 단 감독답게 유 감독이 선보이는 '잠'이란 공포는 간결하고 독창적이면서도 곳곳에 블랙코미디가 녹아 있는 걸출한 데뷔작이다.
 
감독이 관객들의 긴장과 공포를 유도하기 위해 영화에 사용한 장치는 바로 '의심'이다. 등장인물의 직업과 대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 상황, 주변 인물의 반응 등을 통해 현재의 의심스러운 현상을 더욱더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이 마음속에 더욱더 의심을 키워가며 결국 그로부터 '공포'라는 감정이 형성되도록 만든다. 즉, 감독은 시작부터 관객들의 머리와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란 씨앗을 심은 뒤 이를 조금씩 키워나간다.
 
'잠'은 미스터리 스릴러 내지 호러라는 외피 아래 '부부'라는 가장 가깝고도 가장 낯선 관계를 놓고 그들의 모습을 조명하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영화 내내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이는 수진과 현수 부부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문장이자 영화의 공포를 유발하는 근간이기도 하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수진과 현수는 부부라면 어려움 앞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더욱더 함께 힘을 합쳐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고, 이를 지키고자 한다. 이러한 신념은 수진이 이상 행동을 이어가는 현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기이한 현상 한가운데로 발들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공포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뛰어든 수진을 지켜보며 관객들은 노심초사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수진과 현수라는 캐릭터의 설정과 행동을 통해 '의심'의 씨앗을 심어둔 후 관객이 스스로 그 씨앗을 발화시키고 키워나간 후 결국 수진과 현수 중 누구를 믿을지 엇갈리게 만들며 그 빛을 발한다. 이는 감독이 심어놓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도록 만든 것과 관객이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 키운 것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현수는 단역 배우다. 그러나 수면보행증(몽유병)이 시작되면서 단역에서마저 잘리게 된다. 그 후 점차 심각해지는 수면보행증상에 약물 치료를 병행하지만, 현상 유지는커녕 오히려 악화된다. 급기야 수진의 어머니(이경진)는 무속신앙에 기대보라고 조언한다. 이러한 설정과 상황에서 관객은 현수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지녔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조언까지 감안한다면, 현수의 증상은 병세의 악화로 볼 수 있다.
 
수진은 출산 후 아기까지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극도로 예민하고 피폐해진다. 그런 수진은 처음에는 무속신앙을 믿지 않지만,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해결 방안이 통하지 않자 스스로 극도의 불안에 빠진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기에 우연의 중첩으로 현수의 증세가 나아지자 무속신앙에 빠져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출산 후라는 상황은 어쩌면 수진이 산후 우울증이지 않을까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러한 상황과 정황을 설명하는 의사와 무속인의 표정과 말은 관객들의 의심을 더욱더 부추긴다. 이성적이고 의학적으로 현수의 증상을 설명하는 의사는 때로 의심스럽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현수가 겪은 증상의 원인을 말하는 무속인의 말에는 때로 혹하게 된다.
 
관객들을 불안과 긴장, 공포와 의심으로 이끄는 영화 속 또 하나의 중요한 소재는 바로 '수면보행증'이다. 가벼운 증상에서 시작해 생고기 섭취, 자해 등 공포마저 느껴지게 하는 행동들이 잇따르면서 과연 의사의 말처럼 치료 가능한 범위의 병세인지, 아니면 극 중 수진 어머니가 의심하듯 귀신 들린 증세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잠'은 여타 영화와 다르게 '귀신'이란 존재를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러할 것 같다는 '의심'의 코드만 가득하다. 이는 수면보행증이 감기처럼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질환이라는 점, 공포 영화에서 익숙한 소재라는 점에서 관객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이 의심스러운 코드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무속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어떤 장르로 다가올지, 어떤 공포로 다가올지 역시 '관객'의 몫이라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여기에 영화를 구성하는 방식은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자극한다. 총 3장으로 나눠 진행되는 영화는 장과 장 사이 시차를 둔다. 갈수록 평온했던 일상이 두려움과 공포로 바뀐다. 특히 수진은 차분한 광기에 사로잡혀 가는데, 그 사이사이 과정을 생략하고 시간을 점프한다. 장과 장 사이 과감한 생략은 오히려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알 수 없는,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관객은 스스로 공포와 긴장을 만들어 가고 의심을 더하게 된다.
 
영화 '잠'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잠'은 흔히 이러한 장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잔인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동물을 죽이거나 사체를 보여주는 식의 끔찍한 연출을 통해 시각적인 공포를 끌어내지도 않는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을 공포스럽게 만드는 까닭이다. 즉 보여주지 않고 생략함으로써 공포심을 자극하고 그 사이사이를 관객의 상상력으로 메워나갈 여지를 줌으로써 영화적인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극단적인 클로즈업, 소리의 포착 등 카메라와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긴장과 인물의 심리, 즉 불안 공포 광기를 포착해 내는 연출 또한 영화의 장르적인 재미를 배가시킨다. 그리고 감독의 말마따나 '잠'은 배우들의 연기로 완성되는 영화다. 이선균, 정유미 외에도 후추 역 강아지, 김국희 등 배우들의 열연은 영화의 밀도를 높인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앞으로가 더욱더 기대되는 신인 감독을 오랜만에 발견했다는 점이다.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한 신인은 첫 장편부터 칸 레드카펫을 밟으며 능력을 입증했다. '포스트 봉준호' '포스트 박찬욱' 등 거장들의 뒤를 이을 차세대 한국 영화 주자들의 등장을 기다려 왔는데, 유재선 감독이 '잠'을 통해 자신 역시 포스트 시대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임을 보여줬다. '잠'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유재선 감독의 차기작이 기다려질 것이다.
 
94분 상영, 9월 6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잠' 불멸의 밤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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