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고물가·불경기에…흔들리는 중소 건설사들 ②"중소 건설사 위기 배경엔 불공정 신탁계약…'공생구조'로 바꿔야" (계속) |
지역 건설사 임원 A씨는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장에서 시공사 경영 위기가 부각되는 배경에 대해 "물가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공사 원가가 치솟는 등 통제 불가능한 이유로 환경이 변화했는데, 그 리스크를 여러 사업 참여자 가운데 시공사가 고스란히 떠안는 불공정한 계약 구조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A씨 소속 건설사(시공사)와 토지주, 부동산 신탁사, 대출 금융기관 등이 맺은 해당 계약을 보면, 물가가 올라 공사비용이 증가해도 계약금 조정은 불가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수십억 원 규모의 비용 상승분은 시공사가 자체 부담했다고 한다.
계약서엔 정해진 기한 내 공사를 완료하겠다는 책임준공 약속은 천재지변, 내란 등 '불가항력적 상황'을 제외하고 다른 이유로 어길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만약 시공사가 이 약속을 제 때 지키지 못하면 사업을 위해 토지주가 받은 대출 원리금에 대한 상환 의무를 즉시 함께 져야 하며(중첩적 채무 인수), 연체 이자 지급과 수(受)분양자의 입주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도 시공사의 몫이 된다. 사업 참여자 간 합의로 책임준공 기한이 단기 연장되고, 연장 기한 안에 공사가 완료되더라도 시공사의 대출 원리금 상환 의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본래 약속된 준공 기한으로부터 6개월이 지난 뒤에도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으면 2차 책임준공 약속 주체인 부동산 신탁사가 미상환된 대출 원리금과 연체 이자를 갚되, 시공사에 그 상당액 만큼을 배상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런 '시공사 패널티' 조항 가운데 다수는 계약서 본문보다 우선한다고 적시된 특약사항에 포함됐다. A씨는 "신탁 사업의 리스크가 시공사에 과도하게 쏠려있는 셈"이라며 "불공정 계약 관행에 대한 개선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목소리가 일부 건설사만의 주장은 아니다. 민간 건설 연구기관인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김정주 경제금융연구실장은 지난 6월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약정 내용 개선 필요'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최근 활용된 다수 약정서 내용을 점검한 결과 사업장 손실 위험이 일차적으로 건설사에 집중돼 있다"며 "이 약정의 불합리성에 대해선 제도 개선이 지연됐고, 이로 인해 부동산PF(프로젝트파이낸싱) 위기가 지역 중소 건설사들에 보다 심각하게 작용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김 실장은 해당 약정 내용을 분석한 별도 연구보고서(2020년)에서 "민법과 건설산업기본법, 약관규제법 등에서는 상대방에게 현저하게 불리하거나 공정성을 잃은 계약 내용의 무효를 선언하고 있지만, 약정서 주계약과 특약 등에는 이들 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며 "주로 책임준공 의무, 계약금액 조정 불허 등 시공사의 권리나 의무, 공사 대가에 관한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효력 측면에서 주계약에 우선하는 특약이 존재하는데, 이에 대해선 약관규제법이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계약 내용에 대한 금융당국의 검사와 제재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 보완이 돼야 한다며 "정부가 기존 사업 약정 개정을 유도함으로써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 참여자 간 위험 재배분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선 이와 관련해 책임준공 약속 이행 예외 사유인 '불가항력적 상황'에 고물가, 질병, 국제정세 급변 등 시공사가 자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도 포함시키는 한편, 민간 공사에 물가 상승을 반영하도록 하는 강제 규정도 마련해야 한다는 구체적 요구도 나온다. "러시아 전쟁 등에 따른 물가 상승도 불가항력적 사유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시공사가 책임준공 약속을 지키지 못해 중첩적 채무 인수 상황에 놓이더라도, 사업 참여자 합의로 연장된 준공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면 이 상황에서 풀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런 각종 요구를 두고는 호황기 '부동산 불패론'에 기대 무분별하게 계약을 해 놓고, 이제와 책임은 회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 시선도 있다. 한 부동산 신탁사 관계자는 "공사 비용이 증가하거나 공사 기한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리스크를 시공사가 일차적으로 떠안는다는 현실은 맞지만, 그렇게 대출 약정을 맺은 걸 이제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대출 금융기관과 사업 주체, 시공사 간 중재 역할을 하는 신탁사가 해법을 찾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건설사 관계자는 "중소형사들은 자체 신용으로 사업을 따내기 버겁고, 경쟁도 워낙 치열하다보니까 다소 불리한 조건의 계약이라도 응해야 한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의 위기 배경을 분석한 김정주 실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건설사가 뒤늦게 책임 회피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완전히 피해가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김 실장은 "부동산 호황기 때 신탁사와 시공사는 공생 구조였다. 둘 다 책임이 있는 건데, 사업 환경 자체가 급반전됐음에도 약정이 (시공사에) 불공정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서로 양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소·중견 건설사의 위기는 곧 부동산 신탁사는 물론, 부동산PF 대출을 내 준 금융권의 부실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이들 사업 참여자 간 접점 마련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김 실장은 "시공사에 대한 책임준공 기한 연장 합의조차 잘 이뤄지지 않고, 연장 기한 내 준공이 된다고 해도 시공사로선 한 번 묶인 중첩적 채무 인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상화 가능 사업장이라면 책임준공 기한 연장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연장 기한 내 공사가 마무리된다면 시공사의 책임 범위를 축소시켜주는 게 현재로선 단기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