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학교 밖 이전을 강행한 가운데, 독립유공자 단체 곳곳에서 정부의 '이념전쟁'에 독립유공자들이 이용되고 있다는 분노와 우려가 터져나온다.
육사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학교 밖으로, 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 등의 흉상은 교내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심지어 정부에서는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명칭을 바꾸고, 홍 장관에 수여된 건국훈장까지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이에 독립유공자 단체들은 지난 1일 홍범도 장군의 흉상 논란 이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국민의 뿌리가 아니라 외세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비판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한동건 사무총장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홍범도 장군의 정신은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는 데 있다"며 "향후 (기념사업) 축소 등을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기념사업회 측은 "다음 달 25일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를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추모식 겸 청산리 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을 계획하고 있다"며 홍 장군 순국 80주기인 점 등을 고려해 더욱 성대하게 추모식을 준비하겠다는 각오다.
더 나아가 정부의 이념 갈라치기를 위한 독립유공자 이용하기가 비단 홍 장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몽양 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황규식 부이사장은 '정부의 다음 과녁이 여운형 선생이 될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이 홍범도 장군과 여운형 선생의 서훈에 관해 '이중서훈' 받았다고 이야기했다"며 우려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여운형 선생은 사회주의 계열로 분류돼 서훈대상에서 제외됐다가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는 곡절을 겪은 바 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황 부이사장은 "여운형 선생이 제대로 평가받은지 이제 20~30년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완전히 '빨갱이'로 매도돼 있었다"며 "하지만 몽양 여운형 선생은 자주 독립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미국과도 소련하고도 손잡았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평생 자주 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싸웠다"고 설명했다.
황 부이사장은 여운형 선생이 남긴 "나침반의 바늘은 자주 독립이란 북쪽을 가리키기 위해 끊임없이 흔들린다"는 말을 인용하며 "독립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소앙삼균학회 조인래 이사장 역시 "상생하며 살아가기도 바쁜 시기에 진영 논리에 의해 서로 헐뜯고 흑백논리로 갈라치기하고 있다"며 "해방 전 돌아가신 분에게 (이념) 잣대를 들이대 굉장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 역시 납북됐다가 1989년 노태우 정부 때 복권돼 서훈까지 받았지만, 지금까지 저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독립운동가들의 목적은 뚜렷하게 '독립' 하나였다"며 "이념을 기준으로 내 마음에 안 들으면 주적으로 생각하고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2023년인데 (그런 일은) 생각하기도 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독립운동가 단체들은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분노했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성주 상임이사는 "우리 독립운동 영웅들의 역사를 지운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부정한다는 것과 똑같다"며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란 생각으로 반대 투쟁에 함께하고 있다"는 뜻을 밝혔다.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은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최 상임이사는 "최운산 장군의 형 최진동 장군 부대가 자유시 참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부대 중 하나였다"면서 "기록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은 재판관 역할을 했고 최진동 장군은 심판을 받는 입장이었는데, 홍범도 장군 덕분에 살아난 부분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때 저희에게 (피해를) 당한 자 입장에서 얘기를 하라고 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홍범도 장군이 독립운동을 그만둔 것도 아니"라며 "그 이후에도 이분들은 함께 했다. 그분의 일생을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홍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영주귀국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에서는 홍 장군의 흉상 논란 이후 관련 지원사업까지 축소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너머 대한고려인협회' 김영숙 사무처장은 "영주귀국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한국에 들어와 굉장히 어렵게 살고 있다. 이를 지원하자는 논의가 있어 얼마 전 광복회장과 국가보훈부 장관 등이 후손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맺었다"며 "한국에 있는 고려인, 재외동포들에 대한 지원이 확대될 거로 예측했는데 정부의 이같은 기조에 너무 당혹스럽다"고 짚었다.
한편 홍 장군이 말년을 보낸 카자흐스탄 고려인 동포들도 육사의 흉상 이전 계획을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리 류보피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 예술감독과 박 드미트리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 등 고려인 동포들은 1일(현지시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고려인 동포 50만 명도 모국의 적인가'라며 반대의 뜻을 나타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