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고물가·불경기에…흔들리는 중소 건설사들 (계속) |
중소 건설사인 A사는 최근 수년 동안 지역 주거시설 신축 공사를 진행하다가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토지주(시행사), 부동산 신탁사, 대출 금융기관 등과 계약하면서 약속한 기한, 즉 '책임준공'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한 게 결정적이었다. 러시아 전쟁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으로 일부 자재 값은 계약 때보다 두 배 넘게 올라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등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지만, 약속에 뒤따르는 책임은 칼 같았다. 사업장에 투입된 대출금 관련 이자를 비롯해 각종 금융비용을 즉시 떠안게 된 A사는 석 달 기한을 연장해 가까스로 공사를 마쳤다. 이런 연속적인 악재는 수십억 원 규모의 적자로 귀결됐다. A사 관계자는 "공사를 진행 중인 다른 현장까지도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었던 긴박한 상황이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A사처럼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약정'을 맺고 공사를 진행했다가 고물가와 부동산 경기 냉각 등 암초를 만난 중소·중견 건설사들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B사의 경우도 올해 도래한 수도권 오피스텔 책임준공 기한을 지키지 못해 토지주가 받은 해당 사업 대출 원리금 상환 의무를 함께 지게 됐는데, 그 규모가 건설사 자기자본의 80%가 넘는다. 추가 비용 부담에 짓눌려 백기를 드는 곳도 적지 않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최근 문을 닫거나 법정관리를 신청한 유명 중견 건설사들 가운데 책임준공 약정을 맺고 여러 사업을 진행한 곳이 많다"고 말했다.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이란 기본적으로 부동산 개발사업을 원하는 토지주가 부동산 신탁사에 땅과 시행사 지위를 맡기면 신탁사가 사업주체로서의 업무를 대신 해주는 형태의 신탁이다. 여기에 더해 신탁사가 건설을 맡는 시공사(건설사)와 함께 '정해진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겠다'는 책임준공 약속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안정성을 높이기 때문에 금융기관으로부터 사업에 필요한 부동산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금도 비교적 원활하게 끌어올 수 있다.
이 때 대출 상환 의무를 지는 차주는 업무 대리 격인 신탁사가 아닌 토지주다. 그러나 책임준공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해당 의무를 시공사가 1차적으로 함께 지게 된다. 아울러 본래 기한으로부터 일정 기간(보통 6개월)이 지난 뒤에도 완공되지 않으면 그에 따른 손해 배상 책임은 신탁사도 2차적으로 지게 되는 게 일반적 계약 구조다. 보통 사업 경험이 적고 자금을 조달하기 힘든 토지주, 수주가 쉽지 않은 중소·중견 건설사가 신용 보강 차원에서 신탁사와 손을 잡고 제 2금융권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이 같은 방식으로 오피스텔 등 비(非)주택 건설 사업을 대거 추진해왔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이는 통계에도 반영돼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4개 국내 주요 부동산 신탁사의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수탁고) 규모는 2020년 1분기 기준 5조 7300억 원이었지만, 부동산 호황기를 거치며 작년 말 18조 1300억 원으로 3배 넘게 늘었다. 한국신용평가가 작년 9월 기준으로 해당 14개사 가운데 9개사의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장을 분석한 결과 시공능력 100위권 밖의 중소·중견 시공사가 참여하는 사업장이 70%에 달했으며, 아파트보다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큰 그 외 주거시설·숙박시설·상업시설 등의 사업 비중도 80.3%였다.
이들 사업장에서 준공 지연을 비롯한 시공사 위기가 부각되고 있는 이유로는 투입 비용이 최초 예상보다 크게 증가한 점이 우선적으로 꼽힌다. 일례로 시멘트 공급 가격은 최근 2년 새 60% 수직 상승했다. 시멘트 재료인 유연탄 주산지가 러시아인데,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수입이 막힌 영향이 컸다. 대한건설협회가 지난 3월 긴급 조사 대상으로 삼은 전국 154곳의 건설 현장 가운데 시멘트 공급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거나 지연된 곳은 98(63.6%)곳에 달했다. 조사가 이뤄진 곳은 중소 건설사 사업장도 아닌 상위 100위권 내 건설사들의 현장이었음에도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현장 관련 노동조합 총파업으로 자주 공사가 중단된 점도 부담 요인이었다고 다수 건설사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금리 상승기와 맞물린 부동산 경기 냉각으로 자금 회수가 쉽지 않은 점도 시공사의 긴장 배경이다. 한 건설사 인사는 "공사 과정도 어렵지만, 미분양 리스크도 커져 그야말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는 정부의 규제 완화와 맞물려 경기가 회복되고 있지만, 아파트 외 시설이 대부분인 중소·중견 시공사의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장의 냉기류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한국은행도 지난 6월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비은행 금융기관 PF대출의 상당 부분이 상업‧업무용 및 아파트 제외 주거용 부동산 개발에 활용되면서 관련 시장 부진이 연체 규모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한국건설산업연구원(건산연)과 대한건설협회는 책임준공형 관리형 토지신탁 사업장 가운데 준공 지연 상태인 곳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신용평가는 작년 9월 기준 당초 계획 대비 실제 공정률이 5%포인트 이상 미달된 해당 사업장 수가 116곳으로, 2021년 말 48곳에서 크게 증가했다고 분석했는데 현재는 더 늘어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 건산연은 7월 건설동향 브리핑을 통해 "만약 일부 사업장에서 부실이 촉발된다면 공동으로 대출에 참여한 금융기관들에 손실이 발생해 시장에 충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