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논란'…"국방부 기자들도 단체로 화가 난 상태"[안보열전]

■ 방송 : CBS 라디오 <정다운의 뉴스톡 530>
■ 채널 : 표준FM 98.1 (17:30~18:00)
■ 진행 : 정다운 앵커
■ 패널 : 김형준 기자

연합뉴스

■ 진행 : CBS노컷뉴스 정다운 앵커  
■ 출연 : CBS노컷뉴스 김형준 기자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뉴스톡 본 방송에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8/31) <김형준의 안보열전> 시간입니다.

오늘 본 방송에서의 주제는 문재인 정부 국방부의 기조를 뒤집으려는 윤석열 정부, 이거였잖아요.
그 차원에서 지금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 말씀하셨고. 근데 이게 정권 바뀌면 바뀔 수 있다 치는데 지금 역사 왜곡으로까지 가고 있는 그런 상황인 거잖아요.

[기자]
사실은 정치적으로 의도에 따라서 어떤 용어를 골라 쓸 거냐, 이런 게 각 정부마다 논란이 된 적이 다 한 번씩은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문제는 좌우파 그러니까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예우해 왔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폄하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앵커]
그게 우리가 기존에 정립해 왔던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사실까지 거짓으로 가려가면서 뭔가를 하려고 하니까 지금 문제되는 거잖아요.

[기자]
호도하는 측면도 있어요.

[앵커]
그 부분들 하나하나씩 짚어볼게요. 일단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했다.

[기자]
지금 보이시는지 모르겠는데, 국방부가 28일 이번 주 월요일 오후에 낸 입장문입니다. 여기 중간에 보시면 '이로 인해 러시아 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이었는데. 이게 화요일 정례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지적을 엄청 많이 받은 부분이에요. 자유시 참변에 홍범도 장군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이렇게 써놓으면 어떡하냐 하고 항의를 했었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앵커]
개입하지 않았습니다가 팩트인 거예요.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의 급수탑.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의 현장. 연합뉴스

[기자]
네. 왜냐하면 홍범도 부대는 그전에 이미 무장해제를 했어요. 이 자유시 참변이라는 게 1921년 1월에서 3월에 여러 독립군들이 활동을 하다가 이 극동공화국의 스보보드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게 우리 말로 자유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자유시라고 불러요. 여기에 모였다가 고려혁명군과 대한의용군의 통합 차원에서 고려혁명군 쪽이 주도권을 쥐게 됐는데. 대한의용군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은 극동공화국의 군대가 무력으로 무장해제에 나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거든요. 근데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 무장해제를 이미 했는데 뭐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겁니까?

지금 제가 또 들고 왔는데. 이게 한국분들의 이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전북대 사학과의 윤상원 교수가 쓴 논문이거든요. 이 논문에 인용된 내용을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홍범도 장군이 이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장교들하고 솔밭에서 땅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앵커]
어쨌든 학계에서 정립된 내용이 있는데 하나도 크로스 체크를 하지 않고 그냥 발표를 한 건가요?

[기자]
그런 문제가 또 있는데 여기 아래쪽에 봐주세요. 국방부 입장문 아래쪽에 독립군 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했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고 했는데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들 재판에 위원으로 참가했다. 이런 식으로 돼 있는데 이게 교묘하게 약간 호도하는 얘기를 섞어 놨어요.

[앵커]
어떤 부분이죠?

[기자]
일단 400명에서 600명 여기서부터가 문제예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게 정설입니다. 실제 사상자는 수십 명 정도라는 게 정설이고요. 물론 홍범도 장군이 직접 참여하지가 않았으니까 어차피 관련이 없긴 하지만, 이거는 제가 한국외대 사학과의 반병률 교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 숫자가 뭐냐면은 이 당시에 포로로 잡힌 게 864명이다. 그러면은 원래 그 자유시에 있던 군대의 수에서 864명을 빼면 사상자가 대충 계산이 나올 거 아니냐. 이거를 계산했는데 이 피해자인 대한의용군 측에서 약간 좀 과장해가지고 발표한 측면이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문제가 실제로 이게 2017년에 국방부에 저기 간행물에 나온 내용이거든요.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이라는 제목의 일부분입니다.

[앵커]
이게 무슨 간행물이에요?

홍범도 장군 생전모습. 연합뉴스

[기자]
이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독립군과 광복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게 우리 국군의 역사와 연관된다. 이런 내용을 정리해가지고 낸 거거든요. 국방부 간행물이에요.

[앵커]
해당 내용 보여주시겠어요?

[기자]
여기 위쪽에 보시면요. 고려혁명군 주장에 따르면 사망 36명, 포로 864명, 희생자는 1천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피해자 측에 따르면 전체 성원 약 1500명이 피해를 입었다, 고 돼 있는데 그 밑에를 보세요. 피해자 측 추산이 과장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결국 자유시 사건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비극으로 독립군 전력에 큰 타격을 준 참극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게 자유시 참변에서 몇 명이 희생됐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합의된 바는 없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수십 명 수준일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어요.

[앵커]
이미 국방부 자료에 그렇게 쓴 적이 있었다.

[기자]
국방부 자료에도 피해자 측의 추산이 과장됐을 수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해놨잖아요.

[앵커]
아니 자기들이 이미 써놓은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이런 지금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거.

[기자]
지금 이게 3장짜리 입장문에서 내놨으니까 지금 여러분 유튜브 영상에서 많이 보셨을 텐데, 화요일날 국방부 기자들이 단체로 화가 나가지고 국방부에다 항의를 하기 시작을 한 거거든요.

[앵커]
지금 김형준 기자도 굉장히 흥분한 것 같아요. 저희 계속 김형준 기자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안보열전에서 김형준 기자는 약간 스마트하게, 굉장히 이렇게 또박또박 축적해 온 정보들을 많이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좀 약간 격앙돼 있어요.

[기자]
이게 축적된 정보를 보면 볼수록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만큼 논리가 되게 부실하게 돼 있어요.

[앵커]
부실한 지점.

[기자]
이게 계속 보여드리게 되는데 아래쪽을 보면 이런 얘기가 돼 있어요. 홍범도 장군의 빨치산 증명서에는 활동 기간이 1919년에서 22년으로 기록되어 빨치산으로서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던 기록이 있다고 했는데 이건 진짜 되게 비겁한 말이에요. 제가 이거 문장을 보고 너무 화가 났는데 이건 얘기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에요. 빨치산이라는 말은 사실은 우리한테는 한국전쟁 때 극성을 부렸던 북한의 공산 게릴라를 뜻하는 말이잖아요. 이 말의 기원은 스페인 내전에서 온 말입니다. 파르티잔이라고 해가지고 비정규전 유격대를 말하는 겁니다.

홍범도 장군이 자필로 쓴 출입국 카드. 연합뉴스

[앵커]
그래서 이때 쓰인 빨치산이라는 용어는 그럼 우리 한국전쟁 이후에 빨치산과는 다른.

[기자]
우리가 아는 빨치산은 해방 정국 이후에 북한에서 내려와서 산에 올라가서 우리 국군과 계속 교전을 벌이면서 민간인 피해를 일삼았던 그런 공산 게릴라를 의미하는 거고 이때 빨치산 용어는 유격대를 의미하는 겁니다. 게릴라전. 현대에도 심지어 미 합참이 정리한 특수전의 분류를 보면 '언컨벤셔널 워페어(unconventional warfare)라고 부르는데 비정규전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어떠한 정치 세력, 군부가 장악하고 있는 곳에 현지의 저항 세력 같은 거를 긁어모아서 거기에 대항하는 식으로 비정규적인 전쟁을 벌인다.

[앵커]
그때 당시에 빨치산이라 함은 그냥 의병 같은 거다.

[기자]
의병 혹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게릴라들. 이런 굉장히 보통명사적인 의미에 가깝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빨치산이 아니에요. 근데 이거를 굳이 빨치산이라고 적은 건 사실은 국방부가 이거를 호도하는 측면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국민들을 헷갈리게 만들려고.

그리고 그때 정례브리핑에서도 다른 기자들이 지적을 했지만 자유시 참변은 1921년에 발생했습니다. 봉오동 전투 1920년, 청산리 전투 1920년이고요. 김일성이 몇 년생? 1912년생이에요. 그런데 이게 김일성의 공산 게릴라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도대체 왜 이렇게 이제 사실관계를 말을 뒤섞어가지고 호도하는 거예요.

[앵커]
국방부 기자들 지금 무진장 화났습니다. 여러분 아니 다시 한 번 정리해 볼게요. 어쨌든 국방부가 이거 모르고 썼을 가능성 없다고 생각하시니까 이렇게 화나는 거죠.

[기자]
이게 국방부에서 충분히 연구하고 지금까지 연구를 해왔던 전문 인력들이 있어요. 근데 그 전문 인력들이 나름대로 연구해서 낸 결과가 방금 보여드린 이거일 거 아닙니까. 심지어 여기 자문을 받았다고 하니까 더 열받는 내용인데, 이거를 쓴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인데 이 입장문도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치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군에 개입을 하면 군에서는 정치에 복종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뒤트는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앵커]
기자들이 브리핑 현장에서 그렇게 열을 낼 수밖에 없었겠네요.

[기자]
계속 항의를 한 거예요. 어떻게 국방부의 역사 인식이 이 정도밖에 될 수가 없느냐, 그렇게 항의한 게 사실 무리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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