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계획을 놓고 윤석열 정부의 역사관이 논란에 휩싸였다. 현 정부 들어 과거 역사 왜곡 논란을 빚은 '뉴라이트' 학자들이 내각·정부기관 등 요직에 대거 포진된 점을 고려하면 논란은 이미 예고됐던 바나 다름없다.
홍범도는 '반민족 행위자'?…수면 위로 떠오른 尹 주변 '뉴라이트'
국방부에 따르면 육사는 '육군사관학교 캠퍼스 종합발전계획'의 일환으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해 충남 아산 독립기념관 등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이에 대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윤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이종찬 광복회장은 지난 25일 성명을 통해 "국방부가 합당한 이유 없이 (흉상) 철거를 시도한 것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들어내려는 것과 같다"며 규탄했다.
국민의힘 소속 김태흠 충남지사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광복 이전 좌와 우는 같이 독립운동을 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 6·25전쟁과 맞물려 판단해야지 그 전에 공산당 가입 전력을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무능과 실정을 감추기 위해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이념전쟁을 선동하기 위해 독립전쟁 영웅을 부관참시하는 일"이라고 규정하며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이념 대립'을 강조하는가 하면, 국방부는 극동공화국이 망명한 독립군을 유혈진압했던 '자유시참변'에 홍 장군이 참여했다고 강조하면서 논란은 더 커지고 있다.
이처럼 정부 역사관이 논란을 일으킨 일은 우연이 아니다. 2000년대 중반 태동했던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의 핵심 세력들은 윤석열 정권 들어 이미 요직 곳곳에 중용됐다.
대표적으로 대북 강경파인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과거 뉴라이트 학자들의 싱크탱크인 '뉴라이트 싱크넷' 운영위원장을 역임하고, 2005년 출범한 뉴라이트 역사단체 '교과서포럼'에서도 활동했다.
김 장관을 비롯해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한오섭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김종석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 등이 뉴라이트 성향 단체 등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어 임명 당시부터 논란을 빚어 왔다.
최근에는 지난 5월 국무총리실 산하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 부임했던 강규형 명지대학교 인문교양 교수가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체제 이후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로 임명됐다.
강 교수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활동을 두고 '반민족 행위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즈음인 2021년 8월 16일, 강 교수는 인터넷 매체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홍범도가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반민족행위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유시 참변에 책임져야 할 사람인 데다 이 공로로 레닌한테 돈도 받고 대우도 받지 않았나"라며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이나 임시정부 발행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었던 이광수 등 당초 독립운동가였던 사람들에게도 말년의 행보로 '반민족행위자'라는 딱지를 붙인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럼 홍범도를 비롯해 공산주의자들은 왜 '반민족행위자'라고 하지 않나. 이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며 "홍범도를 국립묘지에 모실 것이라면 최남선도 국립묘지에 안장을 하든지 일관성이라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수정권마다 '독립운동사 뒤집기' 되풀이…지지세 결집 노리나
이처럼 반공주의를 내세워 좌익 독립운동가들이 전개한 항일 운동의 역사를 지우려는 움직임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활발하게 추진된 '독립운동사 뒤집기'와도 닮았다.이명박 정부 출범 4년차인 2011년 경기 파주시는 경기도로부터 2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 내에 백선엽 장군 선양비를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김백일 장군 동상도 같은해 5월 27일 경남 거제시 거제도포로수용소 부지에 세워졌다.
백 장군과 김 장군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 간도특벌대로 활동하는 등 친일 행적이 뚜렷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세운 공로 등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각각 수여받았다.
이번 흉상 철거 논란에서도 청사 앞 홍범도 장군 흉상을 빼고 백선엽 장군 흉상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의혹이 언론을 통해 제기됐다. 국방부는 지난 28일 언론 브리핑을 통해 "그런 것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업을 추진하며 좌익 독립운동의 역사를 교과서에서 축소하려다 국민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2018년에 발간된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편찬심의회는 교육부가 작성한 원안에 대해 "계급 해방 운동은 중학교에서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개념이므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문제점과 한계에 유의하라"며 수정안을 제시했다.
정부는 당시 편찬심의회 명단을 비공개로 처리하며 논란을 자초했다. 이에 대해 훗날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전문위원 협의회란 이름으로 편찬심의위원 중 교수 위원들만의 협의회를 사전에 여러 차례 개최한 배경도 의문이지만, 수정안을 보면 교수 위원들이 별도의 회의를 개최한 이유가 특정 역사 연구 그룹의 견해를 관철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고 의견을 달았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주요 보직에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을 중용하고,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해 철 지난 '색깔론'을 펼치는 것은 결국 총선을 겨냥해 보수 지지세를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성신여자대학교 강성현 역사사회학과 교수는 "이들이 '일제강점기에서 과실이 있었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공이 있다'는 정도의 소극적인 공세를 이어오다가 정권이 바뀌고 나서 건국절, 백선엽 추대 운동 등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고 말했다.
이어 "문재인 정권 들어서 국정교과서 사건 책임자들이 처벌되기도 했는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했던 세력들, 반일종족주의자들이 다시 복귀하고 있다"며 "해묵은 이데올로기적 논쟁인 것 같지만 우파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반병률 사학과 명예교수는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독립운동 활동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이 목적은 아닐 것"이라며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대를 불명예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나.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면 역사 문제에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