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홍범도 장군 자유시 참변 행적은 독립운동과 다른 평가"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연합뉴스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1921년 일어난 자유시 참변 당시 장군의 행적을 문제삼으며 다시금 언론 설명에 나섰다.

국방부는 28일 저녁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이라는 글을 통해 "홍범도 장군께서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업적은 부정할 수 없으며, 정부도 이를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을 수여하였고 국방부가 이를 폄훼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면서도 "장군께서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이신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 공산당의 자유시 참변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며, "이로 인해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고 설명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소련 극동 공화국 아무르 주 자유시에서 소련 적군이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대한의용군을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이는 독립군이 세력간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일으킨 사건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주된 해석이다.



당시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토벌이 더욱 심해질 때였다. 그러자 연해주와 아무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상당수 독립군 부대들은 1921년 1~3월 자유시에 모여 독립군 통합을 논의했다.

통합 논의 초기 소련 공산당 극동국(局)이 지원한 대한의용군이 통합 주도권을 쥐었지만, 1921년 4월 '극동지역 볼셰비키 혁명사업'이 공산당에서 코민테른으로 이관되면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이후 통합 조건을 두고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이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1921년 6월 28일 더는 독립군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 치안유지 명목 등으로 대한의용군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은 순순히 무장해제하는 편에 섰다는 평가"라며 "이 때 독립군 측이 400명에서 600명까지 사망하였고 약 50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재판하는 위원으로 참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같이 싸웠지만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간 김좌진, 이범석 장군 등과는 다른 길을 간 것"이라며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하되, 이후 소련 공산당 활동에 동조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달리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또 "일각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이념전쟁과 친일행각으로 부추겨 정치 쟁점화시키고 있는 현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이러한 정치적 쟁점과 무관하게 사관생도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육사에서 육사의 정체성에 부합하도록 생도교육을 위한 최선의 방안을 수립하고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이번 행보는 이념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복잡했던 독립투쟁 속에서, 과거 정부들이 진보·보수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인정한 홍범도 장군의 행보를 '흠집내려' 한다는 시도로 해석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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