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감된 예산은 '여성' 딱지가 붙지 않은 비슷한 정책에 반영돼 사실상 같은 효과를 내고 있지만, 거듭되는 흉악범죄로 놀란 여론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모습이다.
특히 예산 삭감을 주도한 뒤 이를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웠던 국민의힘 소속의 젊은 관악구의원에게는 사퇴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국힘 최인호 "여성귀갓길? 남성은 지원 못 받아"
관악구가 올해 이 사업에 제출한 예산은 7400만원. 대학동, 난곡동, 중앙동 등 3곳에 솔라표지병(태양광을 이용한 바닥조명)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구의회 예산심사 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반(反) 페미니즘'을 내걸고 신림동 등에서 당선된 최인호(국민의힘·21세) 의원이 막아선 탓이다.
회의록에 따르면, 최 의원은 지난해 12월 9일 예결특위에서 구청 측에 "도시재생과의 안심골목길 사업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런데 여성안심귀갓길 같은 경우는 남성들이 지원을 받을 수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업내용이 겹치는데 좀 더 포괄적인 단위 사업이 있는 거라면 도시재생과 사업(안심골목길)을 지속하는 게 맞지 않나"라며 "하나로 뭉쳤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설득 대신 '다른 예산' 선택한 민주당
최 의원이 이렇게 밝힌 뒤 여성안심귀갓길 예산은 전액 삭감됐으며 대신 정확히 그 액수인 7400만원이 '안심골목길' 사업비로 투여됐다.
안심골목길은 골목길 환경을 개선해 범죄 예방을 꾀하는 일종의 셉테드(범죄예방 환경설계) 개념으로 여성안심귀갓길과는 정책 목표나 지정 과정이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당시 구의회에서는 최 의원 주장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동시에 해당 예산을 다른 항목으로 돌려 실질적인 효과를 내는 절충안을 택했다고 한다.
관악구의회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최 의원과는 사고의 출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합의를 이루긴 어렵다고 봤다"며 "그렇다고 모든 예산을 표결로 처리할 수는 없어서 그렇게 갔던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로 여성안심귀갓길 예산으로 설치하려던 솔라표지병은 안심골목길 예산으로 이미 설치가 끝났다고 한다. 구청 관계자는 "어쩌면 이 부분까지는 최 의원도 모를 수가 있겠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구청장 공약이기도 했기 때문에 물러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예산 삭감 자랑했던 구의원에 '비판 봇물'
이렇게 본회의를 통과했던 예산은 최근 신림 지역에서 발생한 성폭행 살인사건을 계기로 재조명되고 있다. 여성안심귀갓길 설치가 막혔기 때문에 관악구 치안이 나빠졌고 결국 이번 사태와 무관치 않다는 논리다.
특히 예산 삭감을 주도한 최 의원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최 의원이 예산 삭감을 자랑했던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계정에도 "당신 같은 의원 때문에 애꿎은 피해자가 생긴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최 의원이 페이스북에 "(범죄가 발생한) 미성동 둘레길은 애초 여성안심귀갓길이 설치된 적도, 설치될 예정도 없었다. 설치됐다고 하더라도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다"라고 반박했지만 논란은 외려 커지는 모습이다.
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는 "특정 집단에 대한 반감과 배제를 부추기면서 보편적 안전망을 없애는 혐오 정책은 뿌리 뽑아야 한다"면서 "국민의힘은 (최인호) 구의원에 대해 빠르게 조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22일 이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상황을 지켜보고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답하겠다"라며 즉답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