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오정세에게는 이런 캐릭터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는 과정 자체가 힘들면서도 즐겁다. SBS 금토드라마 '악귀' 염해상도 마찬가지였다. 오정세가 그려낸 염해상은 구산영과 악귀를 오가던 김태리의 살벌한 연기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염해상은 어딘가 음울해 보이는 민속학 교수이지만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고, 자신 또한 현실 속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성장해 나간다. 염해상과 함께 오정세도 자랐다.
'악귀'가 분명 K-오컬트 흥행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오정세는 스스로에 대한 칭찬은 없이 다른 사람 공으로 돌리기 바빴다. '극한직업' 속 테드창에서 보듯이 오정세는 적은 분량으로도 뛰어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다. 그럼에도 '악귀'에 있어서는 스스로 '국가대표 선수단'에 들어간 '평범한 사람'에 비유했다. 그에겐 주위의 갈채나 평가보다는 염해상과 맞닿을 수 있었던 진심의 순간들이 더 중요해 보였다.
사실 그 동안의 캐릭터에 비하면 '악귀' 염해상이 극 중에서 유독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오정세는 분명히 자신만의 호흡법을 찾아냈고, '악귀'란 드라마에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됐다. 어쩌면 염해상은 다소 진중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소통할 줄 아는 오정세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 '악귀'는 그에게 '이런 캐릭터를 오정세가 해?'라는 또 하나의 물음표를 뛰어 넘은 순간이었다. 다음은 오정세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A 저한테는 감사한 기회였다. 처음에는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해상이란 인물을 만나서, '악귀'를 통해서 저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아무래도 SBS와, 김은희 작가님 대본의 서사 및 짜임새,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메시지 전달, 그리고 이를 이정림 감독님이 잘 연출했고, (김)태리 배우가 잘 날아다녀서 (시청자들이) 즐겁게 보지 않았을까 한다. 저와 함께 다녀주는 이모 매니저님 덕분이기도 하다. (웃음)
Q 방송 초반에는 '내가 알던 오정세가 아니다'라는 반응도 있었다. 염해상이란 인물을 풀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다
A 웃음기 없고, 심각하고, 어두운 인물에 대한 부대낌은 없었다. 대중이 접하지 못했을 뿐, 그런 캐릭터는 제가 예전에도 했었다. 이 인물은 어떤 가치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할 지가 저에게 가장 큰 고민이자 숙제 그리고 산이었다. 귀신을 보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민속학 교수였고, 사회성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일상에서 만나면 되게 매력 없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사를 잘 쫓아가면서 염해상 매력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염해상이 악귀를 잡아야 하지만 안갯속 같이 막막한 느낌을 받는데 저도 처음에 해상이를 만났을 때 잘 그려내고 싶은 목표는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 지 불안했었다. 그런 공통점을 시작으로 조금씩 발맞춰 나갔다.
Q 국내 장르물을 대표하는 김은희 작가와의 작업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많은 의논을 통해 해상 캐릭터를 구축해갔을 거 같은데
A 작가님이 써주신 글에 해상이 매력이 다 있었다. 초반에는 제가 평소에 쓰던 말투가 아니라 편한 말투로 바꿀까 했는데 그러면 해상 같지가 않더라. 그래서 작가님이 써주신 게 해상의 언어라는 걸 알았다. 작가님은 배우가 편한 게 우선인 분이라 제가 말하기 편한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현장에 가면 갈등하다 결국 작가님이 써놓은 대로 하게 됐다. 그러면 또 '김은희한테 졌어' 이렇게 되는 거다. (웃음) 서사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제 아이디어를 들어주시고, 발전하도록 해주셨다. 그래서 더 캐릭터가 풍성하고 입체감 있게 나온 거 같다.
A 어떤 부분에 색을 입히고 강조할 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악귀를 찾아가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 여정 속에서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건들을 지나치지 않기 바랐다. 자기 생명이 위험해도 구하러 가는 발걸음이 가치 있고 소중하단 생각을 하는데 해상에 조금 더 그런 색을 입히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선한 인물이고 기억함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로 생각했다. 억울하게 죽은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 거창하지 않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신중하고 진실되게 인물에 접근했다. 해상을 만나면서 저 역시 마음 아픈 사건 사고를 보면 조금 더 추모하고 기억하는 마음이 진해졌던 거 같다.
Q 각종 귀신 표현을 위해 VFX(시각 특수효과)가 많이 활용됐는데 현장에서 연기할 때는 어땠나
A 대본을 봤을 때 악귀는 머리 풀어헤친 그림자 정도로만 묘사가 됐었는데 영상에서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될 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저희도 방송을 통해 처음 알게 됐고, 기대 반, 걱정 반 했는데 즐겁게 봤다. 현장에서는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웃음) 저와 감독님이 생각하는 귀신 위치나, 리액션 정도가 달라서 '더 해주세요' '가까이서 해주세요' 이런 요청을 받았다. 온전히 상상력으로 촬영했다. 예전에 애니메이션 더빙에서 저는 더 과하게 놀라는 연기를 하면 '가짜' 같단 생각이 들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저 상황과 인물에서는 '진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었다. 그런 경험을 해봐서 연기할 때 스스로 부대끼는 지점을 믿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Q '악귀' 흥행 요인에 김태리 연기를 꼽았다. 실제로 고단한 청년 구산영과 악귀 사이 전환이 너무 자유자재라 호평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함께 작업한 소감은
A 꽤 오래 전에 봤을 때와 지금 느낌이 똑같다. 마음도 몸도 건강한 느낌이다. 자기 작품과 인물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싸워가는 여정을 봤다.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는 지나치게 나눴다. (웃음) 염해상도 성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해줘서 염해상 캐릭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어떻게 보면 해상이가 과거에 얽매여 있었는데 죽은 사람을 기리고 위로하는 과정에서 동시대 사람들을 걱정하고 위하는 사람으로 성장을 했다. 그렇게 캐릭터 완성을 했다. 태리 배우의 연기 방식도 많이 기억이 난다. 산영 같다가 언제 변했는지 모르게 악귀가 되는 느낌이었다. 서서히 변하지만 표현은 극대화되는 접근법이 전체적으로 좋았다. 당연히 상대배우로 연기하기도 좋았다. 해상에게 산영은 첫 친구였던 거 같다. 저도 해상이 그런 고마운 동료를 얻은 느낌이길 바라면서 찍었다.
A 이원석 감독님은 저에게 의미 있는 작품을 만나게 해줬던 분이다. '남자사용설명서'는 가장 큰 부담을 가지고 임했던 작품인데 오정세가 '악귀' 염해상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처럼, 당시 조연만 했던 제가 주인공으로 한 여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스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물음표가 있었다. 그럼에도 감독님이 절 선택해주셨고, 같이 만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가면서 찍은 작품인데 선물처럼 다행히 독특하면서 귀여운 영화가 나왔다. 제일 힘들었지만 의미 있었던 영화였다. '킬링 로맨스'도 감독님이 연락 주셔서 잠깐 나와 달라고 해서 '알았습니다'하고 나갔다. 한번 했던 감독님, 작가님이 손 내밀어 주실 때는 다음 작품이 뭔지는 몰라도 함께하고 싶다. 제가 너무 좋았어서 그렇다. 끌어 당기는 에너지가 다르다. '악귀' 시즌2도 만들면 신나지 않을까. 축구 좋아하는 사람한테 국가대표가 모여있는 곳에서 함께 공을 차자고 하면 당연히 설렐 거다.
Q 다채로운 캐릭터를 맡아 왔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연기를 하면 캐릭터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연기력에 대한 호평도 당연하지만 대중 사이에 선한 이미지가 있다
A 끝까지 의문이고 아무도 풀지 못한 숙제다. (웃음) 다만 이미지 때문에 의무감을 가지고 더 그렇게 해야지는 아닌 거 같다. 나는 작은 그릇인데 이만한 그릇처럼 행동하기 보다는 작은 그릇이란 시선을 받아도 내 안에서의 진심을 가져가고 싶다. 원래는 존재감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봐주시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짙어서 쉽게 지치지 않는다. 작품을 실패하든, 성공하든, 잘 구현하든, 좌절했든 간에 아프게 꺾여도 좋아하는 마음이 강하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 아웃'이 올 때가 있을 거 같다. 어떻게 다시 회복하는지
A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다닌다. 특히 음악에서 채워지는 게 많다. 음악을 깊게 모르지만 들었을 때 찾아가서 듣고, 느끼고 오는 게 많다. 매 작품마다 그렇지는 않지만 인물에 떠올려지는 음악이나 노래가 있으면 많이 들으면서 음악적 도움을 받기도 한다. '악귀'할 때는 김일두라는 가수의 '나는 나를'이란 노래를 계속 들었따. '나는 나를'이라는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가사인데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 된다는 내용이다. 스스로 더 아끼고 사랑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 해상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이자 이야기였다. 청춘들 혹은 이 시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도 좋을 노래 같다. 허화경 작가의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많이 들었다.
Q 입대설이 나올 정도로 '소처럼 일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지
A 예전에 찍었지만 공개나 개봉이 되지 않은 작품들이 있다 보니 많아졌다. 물론 많이 하기도 했다. 작품 속에 스트레스도 있지만 제 안에서의 스트레스이고, 인물을 만들어가는 게 즐거움이라 한 작품씩 끝날 때마다 제 성장에 도움이 된다.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들어 내는 순간이 있다. 이번에 염해상이란 인물도 만나기가 두려웠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만들어 내자고 용기를 냈다. 그게 시작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잊혀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 염해상도 그렇지만 모든 역할이 사랑 받았으면 이후에는 그 색은 없이, 작품마다 새로운 인물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