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6일 대외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군병사 월북사건에 대한 첫 반응을 내놨다. 트래비스 킹 이병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간 지 한 달여 만이다. 시점이 미묘하다.
미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다루는 회의를 추진 중이고,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리는 한미일 정상회의를 이틀 앞둔 상황이다.
북한은 '중간조사결과'라는 형식으로 게재한 발표문에서 미군 내 인권침해와 인종차별을 월북의 사유로 내세웠다.
킹 이병은 "미군 내 비인간적인 학대와 인종차별에 대한 반감을 품고 월북 결심을 했음을 자백했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은 아울러 킹 이병이 "불평등한 미국사회에 환멸을 느꼈다"면서, '북한이나 제3국에 망명할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했다.
월북 사건 이후 한 달 동안 침묵하다가 '중간조사결과'라며 킹 이병의 소식을 전한 데는 미국의 인권공세에 맞불을 놓으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은 마침 하루 전인 15일 유엔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미국을 강하게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한 바 있다.
김 부상은 미국을 향해 "자국사회에 만연하는 인종차별, 총기류범죄, 아동학대, 강제노동행위들을 묵인 조장한 것도 모자라 다른 나라들에 반인륜적인 인권기준을 강요하며 내부 불안정과 혼란을 조장"한다면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성원국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문제》를 상정시킨 미국의 속심이 보편적인 인권보호의 개념과는 절대로 무관하며 자기의 편협하고 패권적인 지정학적 목적을 실현하려는데 불과하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정대진 한라대 교수는 "북한이 외무성 부상 담화를 통해 인권문제에 대해 미국을 비난한데 이어 킹 이병에 대한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한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미군 내 인종차별을 탈영의 주요 이유로 들고 있어 향후 미국과 국제사회의 북한인권 문제제기에 대응하는 카드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다만 북한이 이번 사건을 '공화국 영내 불법침입 사건'으로 규정한 점, 킹 이병이 망명하기를 희망하는 지역으로 북한만이 아니라 제3국도 언급한 점은 눈길을 끈다. '불법침입'에 따른 추방 또는 제3국 망명 가능성을 열어 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만일 북한이 미군 병사를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이라면 제3국 망명이라는 말을 첫 입장 발표에서 꺼낼 필요가 없다"며, "향후 북미관계 상황을 보면서 병사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제3국으로 보내 줄 수 있다는 것을 은근슬쩍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번 발표가 어디까지나 중간발표이고, 북한도 킹 이병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 만큼 장기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임을출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유엔안보리 회의와 한미일 정상회의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뿐 아니라 인권 압박도 강화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은 미군병사의 월북사건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라며, "미국 내부의 인종차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미국의 대북 인권공세에 대한 반박과 반격의 소재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이런 가운데 미 국방부는 북한의 발표에 대해 "검증할 수 없다"며, 현재 킹 이병의 안전 귀환에 집중하고 있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이 킹 이병을 데려 오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개선 등 모종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북한의 중간조사 발표에는 이런 국면이 조성될 때 까지 장기간의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잘 판단해 행동하라고 미국을 압박하는 메시지도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입장을 확정하지 않은 중간 발표를 통해 월북 미 병사의 북한 망명, 제 3국 망명, 불법 침입에 따른 추방, 해결을 미룬 장기화 등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남기며 미국을 압박하고 행동을 요구한 모양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