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찰 1천억원을 대줄테니 신당창당을 하시죠"
지난 1992년 10월 3일 개천절 오후, 북아현동 박태준씨의 자택에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찾았다.
김우중의 1천억 제안
그리고 김 회장은 당시 YS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에게 이른바 ''정치적 거래''를 시도한 것이다.
박태준씨는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김회장,이종찬의원에게도 그런 제안을 했던 걸로 아는데 대우자동차 팔아서 그런 돈 만들 생각이면 회사 재무구조부터 고치라"고 충고했다.
이어 박씨는 김회장에게 비수와 같은 말을 남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대우를 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작년말에 발간된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현암사>에서 박태준씨가 털어놓은 김우중 관련 비화다.
92년은 이른바 노태우,김영삼,김종필씨의 결단(?)으로 탄생한 민자당이 그해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 결정에 난항을 겪고 있을때였다.
김영삼대표최고위원은 자신이 당연히 후보일거라고 생각했지만 민정계 일각에서는 YS대신 박태준이나 이종찬 의원을 대안으로 생각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어느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고 관망자세로 있어 혼란을 가중시켰다.
정주영 회장 의식, 대우그룹 살리기 위해 정치권 기웃거려
당시 정국에서 김우중 회장이 정치권 이곳저곳에 줄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는 그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을 의식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자동차와 북방정책에 있어 라이벌일 수 밖에 없었던 현대를 의식, 김우중 회장도 대우그룹의 보호를 위해 정치적 끈이 필요했고 그같은 절박감에서 박태준씨 등 정치권 인사들에게 1천억원 정치자금 제공을 통한 신당창당을 모색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후 5년 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역시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대우는 ''세계 경영''이라는 이름아래 전세계 곳곳에서 차입한 자금으로 각종 사업을 벌려놓았고 97년 11월 IMF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그 어느 그룹보다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는 김대중,이회창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박빙의 대선 정국속에서 정치적 외줄타기를 해야했고 당시 ''보험금''을 양쪽 모두에 걸을 수 밖에 없었다는게 일반적 정서다.
결국 DJ가 승리하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김우중 회장은 외환위기속에서 경제위기 탈출과 대우그룹의 어려움 해소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정권과 더욱 밀착해 갔다.
최규선 게이트의 2차 녹취록이 공개됐을때 최씨가 폭로한 내용에는 당시 김대통령과 김우중 대우그룹 전회장 사이의 범상치 않았던 관계를 드러내는 민감한 내용도 포함돼있다.
DJ,"김우중씨가 큰 힘 발휘했네" 특별 당부, 최규선씨 주장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최씨에게 "규선이, 대우를 도와주게.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네. 그리고 김우중씨 같은 사람 없네."라며 대우에 대한 특별배려를 부탁했다는 것이 최씨의 주장이다.
최씨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김대통령과 김우중회장간 관계가 보통 이상을 넘는 ''특수관계''를 의미하며, 이 특수관계란 다름아닌 대선 정치자금 제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우중회장은 98년 9월 16일 병환중이던 SK 최종현 회장의 뒤를 이어 새 전경련회장에 오른다.
그러나 당시 국내외에서는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회장이 되는 데 대해 탐탁치 않게 여기는 시각이 많았다.
IMF 경제위기는 결국 외국 금융기관등에서 무차별적으로 돈을 빌려 무모하게 투자한 대우그룹때문에 도래한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가장 강도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했던 대우그룹의 총수가 전경련 회장을 맡은데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특히 잘나가던 삼성마저도 구조조정을 하고 현금 확보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부채가 엄청났던 대우가 기업들중 유일하게 구조조정 대신 확장경영 노선을 고집하고 전경련회장까지 맡은 것은 결국 DJ정부의 묵인때문이라는 설이 정,재계에 난무했다.
구조조정 대신 분식회계, 부실 상태 감추기 급급
김 회장은 이 과정에서 부실을 조기 공개하고 축소경영,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도 대신 분식회계, 해외 차입금 축소 발표 등을 통해 부실상태를 감추면서 위기를 넘기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DJ 정부 관료내에서 조차 비판적 여론이 고개를 들고 IMF를 중심으로 외국 금융기관 등에서 대우그룹에 대한 정리요구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99년 7월 15일 대우사태가 발생했다. 대우 부실은 40조에서 DJ정부 출범 이후 1년만에 80조로 2배나 불어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김우중씨는 98년 9월16일 중국 옌타이 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 참석차 출국 한뒤 5년 8개월간 긴 해외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의혹속에서 김우중 회장은 간간이 포춘지 등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DJ정부가 나가 있어 달라고 해서 그랬다"는 식의 얘기를 흘렸다.
그리고 ''아마 김회장의 귀국으로 잠못이루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김우중씨는 아무리 한국적 특수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왜 박태준씨에게 1천억원이 넘는 신당창당 자금 제의를 했었는지, DJ를 포함한 정치권에는 얼마나 많은 비자금을 뿌렸는지 낱낱이 국민들에게 고백하고 진실을 털어놔야 할 것이다.
노컷뉴스 특별 취재팀 민경중기자 nocutnews@c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