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새벽엔 국자 들고, 낮에는 공구함…19년째 '따뜻한 이중생활' ②"밥이 생명"…굶주린 노숙인들의 '한끼 원정' ③배고픈 이들에게 '천원의 한끼'…행복 나누는 '기운차림식당' ④"'사랑해요' 인사 건네자 눈물…그 모습에 나도 울컥" ⑤눈물의 도시락 봉사 "꼭 임종 전, 아버지 눈망울 같아서…" ⑥한 끼 원정을 떠나는 아이들…그리고 '선한영향력가게' ⑦"어르신, 도시락 왔어요"…반지하 문 열리며 "기다렸어요" (계속) |
"자동차는 길이 좁아서 안 되고, 오토바이는 경사가 가팔라서 못 타요."
폭염경보가 내려진 지난 20일, 경기 성남시 태평동에서 효사랑운동봉사회 김맹임(64) 대표가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김 대표는 "이 동네는 걸어서밖에는 못 간다"고 말한 뒤 녹색 도시락 배낭을 다시 메고 언덕길을 올랐다.
한 다세대주택 앞에 멈춰선 그는 대문을 열고 "어르신, 계세요? 밥 왔어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끼이익' 소리와 함께 계단 아래 있는 반지하 방의 현관문이 열렸다.
집에서 나온 노인은 눈이 부신 듯 눈을 절반만 뜨고는 "아이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라고 답했다. 김 대표는 "여름이니까 아껴두지 말고 바로 드세요"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40년 가까이 무료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 평일 내내 성남 태평동 급식소에서 식사를 제공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 10여명을 위해서 이렇게 직접 동네를 돌며 도시락 배달도 한다.
김 대표와 함께 배달을 나온 봉사자 김남은(60)씨는 세 번째 집을 가리키며 "이 집에는 할머니 혼자 사세요", 여섯 번째 집 앞에선 "여기 할아버지는 허리가 안 좋아서 병원 다녀요"라며 익숙하다는 듯 소개했다. 마지막 배달지인 열 번째 집에 전달하자 계단 아래에서 "기다렸어요.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들이 도시락을 배달하는 곳들 대부분은 가파른 언덕길 위에 있는 다세대주택의 반지하 집이다. 김 대표는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제는 다리 운동도 되고 좋다"고 말했다.
퇴직금 '영끌'해 무료급식소…"부모님 영향"
김 대표의 급식 봉사는 37년 전 새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녀회 활동을 하던 중 동네에서 끼니를 거르는 노인들을 보고는 경로당으로 찾아가 배식봉사를 한 것이다. 김 대표는 "꾸준히 하다 보니 사명감이 생기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시작이 어려웠을뿐 이후부터는 막힘이 없었다. 김 대표는 7년간 다녔던 직장 퇴직금에 남편 돈까지 끌어 모은 1억여원으로 공원 한편에 무료 급식소를 차렸다. 급식소를 2년간 운영하던 그는 굶고 있는 노인들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하고 법인을 세운 뒤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같은 김 대표의 거침없는 행보에는 어릴 적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동네에서 배고픈 사람들을 집 마당으로 불러 꼭 쌀밥을 대접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부모님은 항상 동네에서 끼니를 거르고 있는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차려줬다"며 "어렸을 때는 집에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불만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덕분에 이렇게 봉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어느덧 부모가 된 김 대표 역시 집안 물건을 습관적으로 가져온다고 한다. 선물받은 주방 집기나 식탁 위 소세지 같은 것들이 목표물이다. 김 대표는 "봉사 초기에는 집 안 물건이 없어지면 딸이 '또 엄마가 가져갔냐'고 물어보곤 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가족이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라고 웃으며 말했다.
사각지대 노인 여전히 많아…차별없이 제공하고 싶어
마음같아선 김 대표는 더 많은 노인들에게 밥을 내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지자체의 무료급식 사업을 위탁받아 봉사회가 운영되다 보니, 기초생활 수급자에게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어서다.
서류상으로는 부족할 것 없어 보여도 현실에선 지병을 갖고 홀로 지내는 노인들이 많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그는 "일부 규정에 미달돼 급식사업 대상자에 해당되지 않는 사각지대 노인들이 꽤 있다"며 "하지만 실제 생활은 수급자와 다름 없는데, 차등없이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때문에 김 대표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노인들에게는 최대한 식사를 제공하려 한다. 그러다 이를 인지한 지자체 관계자가 제지하면 웃으며 사과한다고 한다. 김 대표도, 관계자도 제공 대상이 아닌 노인에게 식사를 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 대표와 봉사회의 노력 덕에 급식소는 동네에서 나름 맛집으로 소문이 났다. 매일 평일 점심시간이면 급식소가 위치한 성남 태평4동 행정복지센터로 어르신 100여명이 모여든다.
역할을 나눠 영양사가 식단을 짜고 요리는 주방장이, 배식은 봉사단이 직접 한다. 일주일에 두 번씩 밑반찬을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하지만 수익사업 없이 후원금으로만 운영되다 보니 무료급식을 못 하는 날도 많다. 지자체에서 일부 지원받는 식대와 전기세 외에 임대료와 인건비, 나머지 식대 등은 모두 후원금으로 메꿔야 한다. 이럴 때는 오랜 지인이나 기업에 안부전화를 해 '무언의 도움'을 요청한다. 없는 살림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의지다.
"어르신들 위한 버팀목 되는 게 목표"
오전 시간 도시락 배달을 마치고 급식소로 돌아온 김 대표와 김남은씨는 땀을 식힐 틈도 없이 곧장 앞치마를 둘렀다. 점심 시간인 11시 20분이 가까워지자 급식소로 어르신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오히려 욕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이게 사업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거창한데, 한끼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너무 감사하고 뿌듯하다"며 "식사 한끼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매주 이틀씩 봉사를 하고 있는 김씨도 "이곳을 찾아오는 어르신들에게는 최대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며 "몸을 쓰는 순간은 힘들지만,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이 풍성해진다"고 말했다.
40분가량 이어진 배식이 끝난 뒤에야 김 대표도 점심식사를 했다. 한숨을 돌리나 싶더니 도시락 통을 들고는 "아직 식사를 못한 어르신이 있다"며 못다한 배달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