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류승완의 '밀수' 완성한 김혜수와 염정아의 '연대'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
※ 스포일러 주의
 
'범죄액션'의 대가 류승완 감독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믿고 보는 배우 김혜수, 염정아라는 날개를 달고 '밀수'로 돌아왔다. '해양범죄활극'이라는 장르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류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가장 제대로 펼쳐낼 수 있는 두 사람을 통해 스크린에 구현해 냈다. 그렇게 감독의 믿음은 김혜수와 염정아라는 두 배우의 연대를 업고 완성됐다.
 
평화롭던 바닷가 마을 군천에서 물질(해녀가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하며 살던 해녀들은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먹고살기 위한 방법을 찾던 승부사 춘자(김혜수)는 바다 속에 던진 물건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밀수의 세계를 알게 되고 해녀들의 리더 진숙(염정아)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위험한 일임을 알면서도 생계를 위해 과감히 결단을 내린 해녀 진숙은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조인성)를 만나게 되면서 확 커진 밀수판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고 사람들은 서로를 속고 속이며 거대한 밀수판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기 시작하게 된다.
 
영화 '밀수' 캐릭터 포스터. NEW 제공
'밀수'는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면서 휘말리는 해양범죄활극으로, 류승완 감독의 색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영화이자 그가 가장 잘하는 이야기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다.
 
범죄물과 액션물에 있어서 톱으로 불리는 류승완 감독은 과거 밀수와 관련된 한 줄의 문장에서 '밀수'라는 해양범죄활극이라는 판을 구성했고, 판을 완성할 최대 조력자로 김혜수와 염정아라는 믿음의 배우 두 명을 불렀다.
 
그렇게 시작된 '밀수'는 1970년대, 뉴스나 기사로만 접했던 밀수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탐욕의 충돌을 유머와 액션, 캐릭터들의 활극으로 펼쳐냈다. '활극'(서로 맞붙어서 치고받는 격렬한 싸움이나 총격, 모험, 도망 따위를 주로 보여 주는 영화)이라는 수식에 걸맞게 영화는 빠른 템포를 바탕으로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서로의 이야기와 상황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전진한다.
 
욕망과 배신만이 존재할 것만 같은 밀수판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의외로 '믿음'이다. 춘자의 "나 못 믿어?"라는 대사가 춘자와 진숙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주요한 문장이듯이 영화 속 '믿음'은 캐릭터 간 관계는 물론 이야기의 주요 키워드로 작용한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
물속에서는 믿음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살기 위해 물질을 하는 해녀들에게 물속은 생존을 위한 공간이자 투쟁의 공간이다. 사방이 투명하지만 그만큼 인간은 고립될 수밖에 없고, 육지와 달리 상어 등 최상위 포식자가 존재하며 해녀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러한 물속에서는 함께하는 동료 사이 믿음이 없다면 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혹독한 물속 환경에서 언제나 생존을 시험받는 해녀들 사이의 믿음은 그만큼 끈끈하다.
 
그러나 육지가 자신들의 구역인 남성들에게 이러한 믿음은 중요치 않다. 숨 쉬는 것도 어려움 없고, 육지 위 최상위 포식자 그중에서도 상층에 놓여 있는 남성들에게 그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믿음이나 연대보다 '돈'을 향한 욕망, 즉 자기 자신만의 생존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용이하고 그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물속 해녀들과 육지 위 남성 밀수꾼들의 차이다. 이러한 차이가 빚는 이야기의 갈등 구조가 영화를 끌고 가는 재미이자 중심이 된다.
 
믿음에서 파생된 또 다른 대비 역시 두드러진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격언을 상징하는 두 인물이 조춘자와 장도리(박정민)다. 진숙을 배신했다고 의심되는 상황 이후 춘자는 갈색 머리로 돌아온다. 마치 검은 머리 춘자는 역시 믿을 수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짧은 검은 머리를 긴 갈색 가발로 감춘 춘자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감추고 생존하기 위해 무장한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비록 진숙에게서 믿음을 잃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그때 그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듯 보인다.
 
반면 진숙에게 내내 믿음의 아이콘이었던 장도리는 여전히 검은 머리를 유지한 채 그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검은 머리 짐승에 대한 우화는 믿음을 배신했다 여겼던 갈색 머리 춘자가 아닌, 믿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검은 머리 장도리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상황의 묘미를 제공한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영화는 믿음과 배신을 오간다. 그리고 믿음은 해녀로, 배신과 파멸은 남성 밀수꾼으로 대비되며 활극의 양축을 지탱한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
여러 가지 오락적인 재미와 볼거리가 있지만 '밀수'는 그동안 대작 상업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여성 투톱이 중심이 된 영화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실제로 여름 빅4라 불리는 대작 영화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 모두 남성이 주인공이거나 남녀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였다. 지난해 빅4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밀수'는 김혜수와 염정아를 중심에 두고 주변에 여성들과 남성들을 배치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밀수' 안에는 춘자와 진숙을 중심으로 하는 해녀들의 연대가 이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다. 크게 해녀 진영과 밀수로 돈을 벌려는 남성 진영의 대결 구도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해녀들은 장도리로 대표되는 남성 그룹에 의해 강도 높은 밀수 노동에 투입되지만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해녀들은 춘자를 중심으로 돈이라는 욕망에 눈먼 남성들을 넘어 판을 뒤집는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해녀들에게 목적은 돈도 돈이지만 생존과 연대였고, 남성들에게는 '돈'이 최우선 목표였기에 결국 자멸이라는 결말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밀수'를 두고 여성 서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단순히 여성 두 명이 주인공을 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여성들의 연대가 있다. 그 연대가 가진 힘이 결국 욕망으로 점철된 세계 속에서도 서로의 목숨은 물론 자신들의 길을 잃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밀수'를 두고 주저 없이 '여성 서사'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밀수' 스틸컷. NEW 제공
역시나 '대한민국 대표 배우'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걸출한 두 배우 김혜수와 염정아의 호흡은 뛰어나다. 김혜수의 말마따나 겉으로는 상스러워 보이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생존을 위한 무장인 춘자를 연기한 김혜수 그리고 믿음과 배신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도 책임감을 위해 가짜 연대로 시작해 진짜 연대로 나아가는 모습의 진숙을 연기한 염정아. 춘자와 진숙의 찐 우정과 연대의 찬란함을 표현한 연기는 역시 둘의 조합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에 고옥분을 연기한 고민시는 김혜수와 염정아 사이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색으로 빛난다. 해녀들을 연기한 박준면, 김재화, 박경혜, 주보비 모두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사람들마냥 자연스러우면서도 짧은 컷에서조차 그들로서 빛난다.
 
장도리를 연기한 박정민은 짜증 연기의 대가답게 탐욕 서린 짜증 연기를 기깔(*편집자 주: 여기서는 '탁월'보다 '기깔'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나게 하고, 조인성은 이런 멋을 지니고 이런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라는 사실을 새감 실감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인성이 연기한 권 상사는 액션조차 캐릭터답게 구차하거나 너저분하지 않고 깔끔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다. 그중에서도 떼거리 액션 시퀀스 속 권 상사의 모습은 왜 김혜수가 그의 미모를 칭찬했는지 가감 없이 느낄 수 있다.
 
129분 상영, 7월 26일 개봉, 15세 관람가.

영화 '밀수' 메인 포스터. 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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