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그림 수업: 그림 선생과 제주 할망의 해방일지
강희선 할망은 "세상 오래 살안 이런 것도 해보고 / 꿈에도 생각 안 했어 / 그림 그리는 것"이라며 분홍 털조끼를 그렸다.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어미새를 그린 부희순 할망은 "그리니까 좀 / 배우는 / 기분이 들어"라며 흐뭇해 한다.
붓 대는 재미에 푹 빠져 좋아하는 달달한 커피도 식는 줄 모른다.
오래전 함덕서 사온 옷궤 위에 꽃을 수놓은 이불 채를 그리고는 "그림을 그리다 보니 / 커피를 잊어버리고 / 식어버렸다"고 하소연하는 홍태옥 할망의 손엔 여전히 붓이 들려있다.
동백동산으로 유명한 제주 조천읍 선흘 마을에 오십 중반의 그림 선생이 이사오면서 여덟 할망의 그림 수업이 시작됐다. 최연소 할망은 1940년생, 최고령 할망은 1930년생이다.
미술가이자 예술감독인 저자가 2021년 이사오게 된 선흘 마을에서 진행한 드로잉 프로젝트 '할머니의 예술 창고'를 계기로 마을 할머니들에게 그림을 권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기록을 담은 일지다. 이른바 할망들의 그림 해방 일지.
저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림수업을 하다 호기심에 목탄으로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린 홍태옥 할망의 손짓에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할망과 그림 수업을 시작한다. 이웃 할망의 붓에 호기심을 느낀 할망들도 그림 배우기를 자청했다.
"알구(아이구) 비가 와야 할 텐데 / 저 고추에 물 주잰 하니까(물 주자 하니까) / 물 안 주민(안 주면) / 고추 목숨이 소들소들하여(시들시들해)" -부희순
"새끼를 번성허영 / 이젠 성공허였쭈게(성공했지) / 이젠 큰아덜이(큰아들이) 소를 질렁(길러) / 너미(너무) 고마운 소" -강희선
"부로코리(브로콜리) 밭에서 뽑아다가 / 그림은(그림을) 그리면서 4·3때 돌아가신 / 아주버니 생각이 났서(났어) / 할머니가 개실(계실) 때 / 재필이(김희선 할머니의 아들)에게 / 셋 아버지 재사를(제사를) 잘 모시라고 잘 부탁했서(부탁했어) / 오늘 4·3에 큰아빠 셋 아빠 생각에 / 눈물이 났져(났어)" -강희선
그림 그리기에 빠진 할망들은 흙을 일구고 밭일을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고 생각나는 것들을 글로 적으며 몸과 마음의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한데 모여 붓을 들며 예술가로서 성장해가는 자신도 발견한다. 저자는 이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자의 일기 뒤로 이어지는 아흔 가까운 할머니들의 그림과 글은 놀랍다. 외딴 제주에서 평생 땅과 바다만 바라보며 신산했던 할망들의 그림은 신비했고 글은 시인 뺨쳤다. 그림의 색감과 붓에 실린 힘이 느껴지는가 하면 글 소절마다 마음을 두드린다.
여백에 핀 색색깔 그림에 할망의 기억이 살아있고 툭하고 던진 한마디에 희로애락이 진하게 뭍어난다.
텅 빈 화폭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 할망들은 해방감을 느끼며 예술가로 변신했다. 한국전쟁, 제주 4·3 사건 등 야만적인 역사를 온몸으로 지나오며 가슴 속 제주여인의 한을 켜켜이 쌓아온 할망들의 속 이야기를 여백에 풀어놓자 꽃이 핀다. 애잔하면서도 때론 귀엽고 유쾌하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 선생과 할망들이 나눈 우정과 사랑도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할망들 집 농산물 창고는 그림 작업실이자 갤러리가 되고 선흘 마을은 어느새 예술가 마을이 되어 더 신나는 일들을 찾기 시작한다.
마을 영농조합은 할망들의 그림을 스티커로 만들어 선흘 마을에서 출하하는 감귤 상자에 붙였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할머니들과 그림수업을 열어보겠다고 나섰다. 청년 협동조합이 생기는가 하면 동네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늘어서 본교로 승격했다. 선흘 마을 동네 예술가들과 주민들은 별일 없이 수시로 모여 그림을 그리고 꽃모종을 나누면서 생기 넘치는 풍경을 쌓아가고 있다.
"우리 바매기(바매기오름)는 선흘에 있다 / 설문대 할망이 흙을 치마에 싸서 터러진거시(털어버린 것이) / 오름이 됬다(됐다) / 옛날에는(4·3을 말한다) 억새 산이라 / 지금은 소나무 맹개나무(망개나무) 밤낭이(밤나무가) 만애서(많아서) / 알바매기 되연(되었다)" -고순자
"큰딸 자근 손지가(작은 손주가) / 할머니 배개 사 왔서요(베개 사 왔어요) / 한 4년 댄 것 가타(된 것 같아) / 이것 배고(베고) 누우면 / 아무 생각 안 난다" -오가자
저자는 "할머니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킨 공통의 도구는 '백지'라는 텅 빈 무대"였다며 "할머니라는 사피엔스가 해방 이후 나아가게 될 세계에 대한 기록 역시 백지라는 영역에서 매일매일 시작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고 말한다.
저자의 글은 거들뿐 주인공은 그림 공부가 너무 좋다는 할망들이다. 그럼에도 독백처럼 일기처럼 할망들을 관찰하고 만남 속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고 고백하고 딸처럼 손녀처럼 풋풋하다가도 진한 애정이 담긴 글은 마치 그림 동화책을 읽는 것 같다.
그렇게 '할머니의 그림 수업'은 제주의 경쾌한 하늘과 숲, 바람을 맞듯 읽는 이에게 맑고 몽글몽글한 푸근함을 남긴다.
최소연 지음ㅣ김영사ㅣ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