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코인) 리플(XRP) 자체는 증권이 아니라는 취지의 미국 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시장이 안도하는 기류다. 이번 판결 내용은 단순히 개별 코인에 국한된 게 아니라, 시장 규제의 첫 단추로 여겨지는 코인 증권성 판단의 가이드라인으로서 국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플은 15일 기준 비트코인, 이더리움, 테더, BNB에 이은 시가총액 세계 4위 코인이다. 국내 시장에선 투자 규모가 비트코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인기 코인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지난 2020년 1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리플을 '미등록 증권'이라고 보고 리플 발행사인 리플랩스와 최고 경영자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리플 측은 이에 증권이 아닌 상품이라며 긴 시간 맞서왔는데, 13일(현지시간) 미국 법원이 내놓은 약식 판결은 사실상 리플 쪽의 손을 들어줬다는 평가다.
뉴욕지방법원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는 이날 "리플랩스가 거래소에서 일반 투자자들에게 (리플을) 판매한 것은 연방 증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리플 자체는 증권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토레스 판사는 '제 3자의 노력으로 이익을 얻는 공동기업에 수익을 기대하고 돈을 투자'하면 증권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거래소에서 일반 투자자를 대상 삼은 (리플) 판매의 경우 투자자들이 리플의 이익에 대해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일반 투자자들은 자신이 지불한 돈이 리플랩스로 가는지, 다른 판매자에게 가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반면 토레스 판사는 리플랩스가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자들에게 리플을 판 건 연방 증권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기관투자자에 대한 리플 판매는 투자자들이 향후 리플 가격 상승을 기대했기 때문에 투자계약에 해당한다"며 "이 경우 연방 증권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관투자자들의 경우 투자금을 통한 리플랩스의 노력으로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리플을 구매했다고 본 것이다.
'리플 자체는 증권이 아니지만, 판매 내용에 따라 증권법 적용 여부가 갈린다'는 게 판결의 요지라는 게 복수 전문가 분석이다. 법 위반이 일부 인정됐음에도 '리플은 증권이 아니다'라고 주장해 온 리플랩스의 실질적 승리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리플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단은 국내의 코인 규제 방식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코인의) 증권성과 비증권성을 가르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의 세부 내용이 코인에 기존 자본시장법을 적용해 규제할 수 있는 경우를 보다 세밀하게 가르는 실무적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취지다.
아직 SEC 항소 가능성이 남아있는 등 변수가 있지만 가상화폐 시장은 이번 판결로 일단 한 숨 돌리는 모양새다. 만약 미국 법원이 리플 자체가 증권이라고 판단했을 경우, 증권 관련법을 따르지 않고 거래된 여러 코인들의 거래정지와 퇴출, 각종 소송이 뒤따를 수 있다는 시장 우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긴장이 해소된 영향으로 판결 직후 리플 시세는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업비트에서 개당 617원이었던 것이 한 때 1125원까지 80% 넘게 수직 상승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다른 여러 코인들도 '리플 호재'에 강세를 보였으나 이후 한국시간으로 15일엔 상승분을 반납 중이다. 이날 오후 3시 25분 현재 리플은 930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이정두 한국금융연구원 전문위원은 통화에서 "미국 SEC가 적극적으로 코인을 증권으로 지목해 규제를 집행하면서 시장이 침체됐던 측면이 있다"며 "이번에 (법원에서) SEC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준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이에 따라 '일반 개인들이 거래하는 코인은 증권이 아닐 수 있다'는 기대 심리가 생기면서 시장에 호재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