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의 한 빌라에 사는 A씨는 지난 5월 경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 수사관은 A씨가 뉴스에서만 보던 '전세사기' 피해자라고 알려왔다. 대출금만 2억, 보증금 3억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대차계약을 중도 해지한 후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에 나섰다.
임차권등기명령은 임대차 계약이 만료됐지만 보증금을 되돌려 받지 못한 임차인이 단독으로 등기부 등본에 임차권을 명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임차인이 이사 나가면 실거주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선변제권이 사라지는데, 임차권등기명령을 완료하면 이사 여부에 관계없이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A씨의 '보증금 지키기'는 첫걸음조차 내딛기 쉽지 않았다. 그는 "서울남부지법에 지난달 28일에 접수를 했는데, 제 앞에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이) 600건 이상 밀려 있다더라. 접수가 폭증해 5주 이상 걸린다고 안내 받았다"고 답답해했다.
서울 강서구, 구로구, 금천구 등에 전세사기 피해자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남부지방법원에서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는 피해자들의 어려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허그) 전세보증보험 구제의 첫 단추인 '임차권등기명령' 신청부터 막히면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제때 이사를 가기도, 구제 절차를 밟기도 어렵다.
피해자들은 "이 곳보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적은 법원은 짧게는 2~3일, 길어야 2주 안에는 끝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같은 서울 관내에 있는 법원 가운데 북부지법 관계자는 보정명령이 나가지 않는 임차권등기신청 사건의 경우 신청부터 결정까지 2~3일, 동부지법은 별다른 보정사항이 없으면 접수 다음 날에 명령이 나간다고 설명했다. 서부지법은 접수 후 1~2주 안에 명령이 나간다며 보정이 필요하면 1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유독 남부지법의 임차권등기명령 접수가 늦어지는 이유는 애초 관련 신청 자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취재진이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을 통해 지난해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간 임차권등기명령 신청 건수를 서울 내 자치구별로 살펴본 결과, 가장 적은 중구의 경우 47건인 것에 비해 가장 많은 강서구에는 2488건이나 몰려있었다.
법원별 관할 지역을 기준으로 분류해 봐도 서울 남부지법이 4913건으로 서울 전체 신청 건수의 절반(50.1%)을 넘겼다. 이어 중앙지법 1678건, 북부지법 1452건, 동부지법 905건, 서부지법 849건으로 나타났다. 신청 건수가 가장 적은 서부지법과 남부지법을 비교했을 때 5배 이상 차이가 난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이철빈 공동위원장은 "남부지법에 임차권 등기을 접수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답이 안 온다는 피해자도 있다"며 "임차권 등기 신청 명령이 많다 보니 법원이 소화를 못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심지어 이런 와중에 남부지법의 '느긋한' 대처가 '임차권등기명령' 대란을 부채질하고 있다.
취재진이 지난 7일 찾은 남부지법 민원신청과 접수처에는 '현재 급격히 늘어난 임차권등기명령신청서 접수로 인해 임차권 등기부 기재까지 4주~8주 가량 소요된다. 너른 양해 부탁드린다'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었다. 이날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을 하러 온 한 피해자 박모씨는 "강서구에 (피해자가 많다는 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다시는 강서구에 살고 싶지 않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남부지법 접수처에는 겨우 단 2명의 직원만이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서를 접수받고 있다. 이들은 "한 달 정도 전에 받은 신청을 지금 처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부지법은 "법원이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데 있어 조금 굼뜬 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예측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어려움이 있다"고 해명했다.
이처럼 법원 행정 처리가 늦어지는 만큼 피해자들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단순히 사태 해결이 늦어질 뿐 아니라, 정부가 내놓은 각종 구제대책의 첫단추인 임차권등기명령부터 막히면서 피해자들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경제적 피해도 막심하다.
구로구에 사는 전세사기 피해자 서모(34)씨는 "임차권등기가 나와야 이사를 할 수 있지만,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이사계획도 못 세우고 있다"며 "더 큰 문제는 올 8월에 생일이 지나면 만 35세가 돼 청년버팀목전세자금대출 대상자에서 탈락한다. 저금리에 이사 갈 기회도 뺏기는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그러면서 "지체되는 만큼 전세대출이자도 계속 나가는 상황"이라며 "고금리 시대에 매달 140만 원씩 이자가 나간다"고 덧붙였다.
주택세입자 법률지원단체인 '세입자114' 사무처장 김대진 변호사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임차권 등기 이후에 해야지만 대항력을 계속 인정받을 수 있다"며 "만약 임차권 등기 신청은 했지만, 결정이 늦어진다면 그 기간에는 다른 곳에 이사하기 어렵거나 새로 이사를 가더라도 전입신고를 못 해 다시 보증금이 안전해지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은 임차권등기명령이 허그 전세보증보험 이행청구의 선행조건인만큼 신청부터 막히면 이후 절차도 늦어진다며 답답해했다.
지난 6월 15일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한 강서구 전세사기 피해자로 이사를 준비 중인 이모(33)씨는 "부천 등에서는 며칠 안에 바로바로 신청된다더라"며 "허그에서 운영하는 구제제도도 임차권등기명령이 없으면 신청할 수 없는데 (임차권등기명령 결정이) 한 달 넘게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특별법에서 진행하려는 제도로 실제 혜택을 받으려면 최소 3~4달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세사기 피해자가 몰리는만큼 법원 행정 인력을 유연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전세사기피해자전국대책위 김주호 실무지원 팀장은 "전세사기가 하루 이틀 만에 끝날 문제도 아니고 특별법 (기한)이 2년으로 돼 있으니, 당분간은 임차권 등기 등에 법원의 실무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 법원 행정 인력을 추가로 배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입자114' 센터장 이강훈 변호사도 "법원에서 등기와 집행 관련된 부분에 사건이 많이 몰릴 수 있는 만큼 인력 재배치를 통해 사건이 원활하게 해결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