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 약화 부른 '행위별 수가제'…"보상체계 개편 시급"

6일 오후 연세대 세브란스빌딩에서 개최된 제3차 의료보장혁신포럼('지역·필수의료 강화 등을 위한 건강보험 지불제도 혁신방향'). 보건복지부 제공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의료비 급증이 예상되는 가운데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행위별 수가제' 일변도인 지불제도 개편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상대적으로 보상이 큰 의료행위에 인력이 몰리면서 필수의료 약화를 불렀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보건복지부는 6일 오후 서울 중구 소재 연세대 세브란스빌딩에서 '지역·필수의료 강화 등을 위한 건강보험 지불제도 혁신방향'을 주제로 한 제3차 의료보장혁신포럼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그간 필수의료 인프라 붕괴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행위별 수가제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행위별 수가제는 의사의 진료 행위마다 가격을 매겨 지불하는 제도다. 진찰, 검사, 처치 등에 대해 건보에서 의료기관 등에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대가가 '수가'다. 의료계에서는 흉부외과 등 국민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가 '기피 과'로 전락한 데엔 고난도 수술 및 야간·휴일 당직 등에 대한 충분한 보상체계가 부재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날 첫 발제자로 나선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 교수는 외래와 입원, 동네 병·의원과 병원급 의료기관 모두 행위별 수가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짚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대부분 1차 의료기관에서 인두제(의사가 맡은 환자 수에 따라 진료비를 지급하는 제도)와 행위별 수가제를 병행하는 동시에 병원에서는 포괄수가제와 총액제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다는 것이다.
 
국내 지불제도는 행위별 수가제의 점유율이 93.4%에 달하는 독식 체제다. 진료 종류·양과 관계없이 하나의 질병에 대해 정해진 총 진료비를 지급하는 포괄수가제(2.1%)나 일당제(4.5%)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그마저도 "포괄수가제와 일당제에서 고가의 행위, 약품, 재료는 별도로 행위별 수가제를 적용하기 때문에 행위별 수가제가 대부분"이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진현 교수(서울대 간호대) 발제자료 중 일부.

행위별 수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매년 병원(급), 의원, 약국, 조산원 등 유형별 협상으로 결정되는 '환산지수'에 업무량과 인력·시설·장비 등 자원량, 위험도를 고려해 산정한 '상대가치점수'를 곱한 후 각종 가산율을 추가 계산하는 방식으로 책정된다. 올 2월 기준 행위목록 수는 9천여 개에 이른다.
 
성과도 없지는 않았다. 상대가치의 지속적 개정으로 항목 간 불균형이 완화됐고, 복지부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일관된 수준의 수가를 결정하면서 계약제가 양측이 합의 가능한 수준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공급자 단체의 담합구조가 약화되며 특정 단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어졌다.
 
다만, 상대가치에 전문과목 간 수익 불균형이 그대로 반영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필수진료 과목의 기반이 약해졌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됐다. 상대가치 구성요소 중 의사의 업무량을 '인건비'로 해석해 적용한다든가, 전공의의 인건비를 제외하지 않고 포함시켜 인기과목의 상대가치가 과다 계상된 부분이 문제점으로 꼽혔다.
 
대형병원에서 주로 수행하는 의료행위에 보상이 집중되다 보니, 자연히 병상 수는 급증하고 1차 의료기관은 축소됐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필수의료 과를 유지하고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대가치체계의 종합적 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신현웅 선임연구위원도 "우리나라와 같이 단가만, 매년, 모든 행위에 대해 평균적으로 인상해주는 기전은 없다"고 지적했다. 현행 행위별 수가제를 유지한다 해도 필요한 곳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인상하는 '상대가치 가격제'로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저출산 심화로 직격타를 맞고 있는 산부인과(분만), 수술·처치 등 저평가 진료영역에 대한 보상을 늘리고, 기계·장비보다 인력 투입 관련 보상을 강화해야 한다고 봤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신현웅 선임연구위원 발제자료('건강보험 보상체계 미래방향') 중 일부. 복지부 제공

공급자 중심의 분절적인 의료서비스 제공을 환자 중심의 통합적 체계로 만들려면 지불단위도 진료형태 특성에 맞춰 포괄화돼야 한다는 게 신 선임연구위원의 지적이다.
 
과도기적 대안으로 진료량이 아닌 '필요'에 기반해 충분한 수익이 보상되는 '공공정책수가'를 활용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지불제도 전면개편을 위한 건보법 개정 전까지 필수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한 취지다. 보상단위도 개별 행위에서 지역, 네트워크, 기관, 인력 등으로 다양화하자고 했다.
 
어린이병원 사후보상과 권역 심뇌혈관지원센터 네트워크 보상(이상 대안형), 중증소아 단기입원 수가 등(보완형)이 공공정책수가의 예로 언급됐다. 
 
신 연구위원은 향후엔 건보 총 수입을 예측해 환산지수(지출)를 결정하는 사전예산제를 도입해야 효율적 재정관리를 도모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 발제자료('건강보험 보상체계 성과와 한계') 중 일부. 복지부 제공

김 교수도 "의료보험 도입 후 지난 30여년 간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8.1배 증가한 반면 1인당 건보 급여비는 29.8배 증가했다. 건보 재정지출이 국민소득보다 3.5배 이상 증가한 것"이라며 "고령화 추세를 고려하면 급여비는 이전보다 더 가파르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정부도 이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복지부 정윤순 건강보험정책국장은 "투입 중심의 현 지불보상체계로는 초고령사회 전환에 따른 재정적 지속가능성 위기 대처, 지역·필수의료 위기 극복 등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올 하반기 발표할 제2차 건보 종합계획에서 건보 지불보상체계 혁신을 위한 구조 개편방안과 다양한 공공정책수가 모델을 제시할 것"이라며 "이를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이행 로드맵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보사연 신현웅 선임연구위원 발제자료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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