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공탁 왜 밀어붙이나?

4일 서울 종로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모습. 연합뉴스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손해배상 확정판결에 대한 제3자 변제 '해법'을 수용하지 않은 피해자들의 판결금을 법원에 공탁하려던 일에 잇따라 '불수리' 결정이 나오면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새로운 법정 공방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광주지법에서는 피해 당사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변제를 거부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탁관이 공탁을 불수리 결정하면서, 재판부가 법리를 따져 공탁 여부를 결정하게 될 예정이다. 공탁이 불허될 경우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채권도 소멸하지 않게 되면서, 국내에 있는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 자산에 대한 강제 현금화 조치가 가능해지게 될 전망이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재단법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지난 3일 제3자 변제 '해법'을 수용하지 않은 강제동원 소송 원고 4명에 대한 판결금을 법원에 공탁하는 절차를 개시했지만, 광주지법 공탁관이 생존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공탁을 '불수리' 결정했다.

이는 양 할머니가 이미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민법 469조는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며 "이해관계 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하여 변제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외교부는 4일 입장을 내고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정부는 (공탁에 대해) 이미 면밀한 법적 검토를 거친 바 있고, 불수리 결정은 법리상 승복하기 어렵다"고 이의 절차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변제공탁 제도는 원래 변제를 거부하는 채권자에게 공탁하는 것으로서, 그 공탁이 변제로서 유효한지 여부는 향후 재판 과정에서 판단될 문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5일 광주지법 공탁관은 정부의 이의 신청을 "이유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교부는 5일 오후 "이의 신청도 불수용한 것은 법리상 승복하기 어려운 바, 재판 과정에서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공탁 수리 여부 결정은 광주지법 재판부가 법리를 따져 결정하게 될 예정이다.

판결금 공탁에서 쟁점이 되는 지점은 크게 2가지다. 민법 469조에 따라 당사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공탁을 법원이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 자체와 함께, 공탁이 받아들여질 경우 피해자들이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에 가지고 있는 채권이 소멸되는지 여부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윤창원 기자

광주지법 공탁관은 민법 469조에 따라 양금덕 할머니의 변제 거부를 이유로 공탁에 대해서 불수리 결정을 했고, 이의 신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으로 있을 법정 공방에서 만약 법원이 공탁을 기각하게 된다면, 외교부는 면밀한 법률 검토 없이 공탁을 밀어붙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외교부는 외교부대로 공탁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민법 487조를 근거로 들고 있다. 487조는 "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아니하거나 받을 수 없는 때에는 변제자는 채권자를 위하여 변제의 목적물을 공탁하여 그 채무를 면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탁과 함께 판결 승소 원고들의 채권이 소멸되는지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4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의 채무를 없애 주려고 공탁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일본 정부의 요구 등에 의해서 공탁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강제집행(현금화 조치)을 정지하기 위해서 공탁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외교부 내부적으로는 공탁을 하지 않을 경우 판결금에 대한 지연이자가 연 20% 발생하지만 공탁을 하게 되면 연 0.35%만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원고들에 대한 형평성 문제 또한 고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당국자는 다른 취재진이 '채권 소멸의 목적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부가 공탁 절차를 밟으면 재판부는 그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어 심리 자체가 지연되고, 해법을 거부하는 피해자들의 현금화 절차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저희가 받은 법률 자문으로는, 공탁금을 수령해야만 피해자 (본인 또는) 유가족 분들께서 보장된 권리가 실현되고 채권을 만족하게 된다고 자문을 받았다"며 공탁 자체로는 채무가 소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피해자 측 대리인단은 "공탁이 유효하다는 전제 하에 변제공탁을 하게 되면 채권은 소멸하게 된다"며 "변제공탁을 하면서 채권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기만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만약 이 말대로 변제공탁을 통해 채권이 소멸하게 된다면, 이는 일본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할 의무가 소멸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 정부가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의무를 없애 주는 셈이다.

외교부와 재단은 지난 4월 '해법'을 받아들인 강제동원 피해자 10명의 유가족에게 판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도 이로 인한 '채권 소멸'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부인한 바 있다. 당시 재단 관계자는 "외부 검토 결과 제3자 변제를 할 경우 영수증, 또는 변제수령증명서만 있으면 채권소멸각서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는 해석을 받았고,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결금을 지급받은 피해자나 유가족들이 다시금 소송을 제기하거나 강제 현금화 절차를 진행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효과는 채권 소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제동원 문제를 둘러싼 사안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가 현금화 절차라는 점에서 이러한 효과가 지니는 함의는 작지 않으며, 같은 맥락에서 정부가 민법 위반 소지에도 불구하고 공탁 등을 진행하는 의도에 대해 의심을 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다른 법원에서도 공탁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단 5일 전주지법은 재단이 지난 3일 고 박해옥 할머니를 대상으로 한 공탁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이는 법원이 재단에 상속인을 유족 등으로 보정하라고 권고한 뒤, 기한을 지난 4일까지로 정했지만 소명자료가 제출되지 않아서다. 박 할머니는 이미 고인이 됐기 때문에 민법상 공탁 상속인이 될 수 없다.

외교부는 입장을 내고 "이 건은 지난 3일 제출한 돌아가신 피해자(박 할머니) 본인에 대한 공탁 신청에 대해 불가피하게 상속관계 사항을 정리하지 못해 형식상 불수리된 것일 뿐, 제3자 법리로 인해 불수리된 것이 아니다"며 "현재 고인에 대한 공탁 신청을 통해 파악한 상속인들에 대해 별도로 공탁 신청 절차가 진행 중이다"고 밝혔다.

쉽게 말해 외교부도 고인에 대한 공탁은 불수리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신청했으며, 이를 통해 파악한 유가족들에게 별도로 공탁 신청을 할 예정이라는 얘기다.

재단은 사망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정창희 할아버지와 고 박해옥 할머니의 자녀 2명에 대한 판결금도 지난 4일 유족의 주소지 관할 법원인 수원지법에 공탁했다. 공탁관은 서류 등을 검토해 공탁 수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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