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그 동안의 라미란 타이틀롤 작품이 '코미디'에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드라마적인 요소가 상당했다는 것. 때로는 그치지 않는 눈물에 촬영에 난관을 겪기도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나쁜엄마'는 라미란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10년 단위로 오는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됐다. 자신에게 온 기회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라미란의 노력이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촬영 때문에 머리에 브릿지를 넣고 나타난 라미란에게서 영순을 찾기는 어려웠다. 현실의 라미란과 영순은 180도 다르다. 라미란은 영순처럼 자식에게 헌신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삶에 집중해왔다. 그럼에도 영순이 가진 삶의 가치를 온전히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라미란 역시 드라마에 녹아들 수 있었다. '나쁜엄마'가 요즘 몇 없는 따뜻한 가족 드라마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단역이나 조연 시절과 다름없이, 라미란에게 작품 하나, 하나는 언제나 소중하다. 매 작품에 임할 때마다 간절하게 임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풍부한 서사를 부여해주는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기 어렵단 생각이 늘 깔려 있다. 주어지면 그냥 열심히 한다. 라미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장 단순한 원칙이지만 사실 주연급 배우가 이런 자세를 갖긴 쉽지 않다. '엄마' 라미란보다는 '배우' 라미란의 삶을 살았고, 지금도 그에게 연기는 삶에서 가장 최우선되는 본질 그 자체다.
다음은 라미란과의 인터뷰 일문일답.
A 역시 14부는 짧지 않았나 싶다. 저도 좀 아쉬워서 작가님한테 더 힘을 내보자, 보통 16부 정도는 나오니까 마무리를 급하게 하는 게 싫다고 했는데 처음부터 잘 마무리를 하신 거 같았다. (웃음) 더 이상은 이야기를 못 드렸고, 어쨌든 지난해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촬영했는데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 많다 보니 예전에 공연을 하거나, '응답하라 1988'의 골목길 사람들처럼 함께 복작거리며 있는 게 너무 좋았다. 이사 가기가 아쉽다.
Q 타이틀롤이기도 했지만 워낙 '코미디'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서 부담도 있었을 듯하다
A 주인공이 끌고 가는 작품이 아니어서 좋았다. 주변 인물도 살아있고, 각자의 이야기가 다 합쳐져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오롯이 혼자 끌고 간다는생각을 하거나 무겁게 책임감을 가지진 않았던 거 같다. 이미 몇 작품 전부터 흥행 부담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웃음) 코믹한 이미지는 지나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역할을 만나고 다른 작품을 하면 또 거기에 맞는 색깔을 잡고 가는 거다. 운 좋게 재밌게 봐주시면 또 언제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가 나온 드라마와 영화를 합치면 50~60편 정도 되는데 옛날 거 보면 지금 봐도 재밌는 작품들이 있다. 정말 뭐가 터질지 알 수 없는 거고, 그러니까 그냥 열심히 하는 거다.
Q 영순의 삶이 참 어떻게 보면 기구하다. 여기에 시한부 설정까지 있었는데 결말엔 만족하는지
A '기구함'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그걸 본인이 얼마나 받아 들이는지 문제 같다. 영순은 강하고 씩씩한 사람이라 그걸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사람이다. 또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다. 마지막에 영순이 너무 힘들지 않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해서 좋았다. 영순의 죽음 자체가 굉장히 슬프거나 마음 아프게 다가오지 않으면서 잘 짜여진 결말이다.
A 여자라면 물론 모성애를 갖고 있을 수 있고, 그게 어떤 모양으로 빚어질 지는 모른다. 다만 '엄마'보다는 '영순'이라는 인물 자체에 집중했다. 엄마라서가 아니라 영순이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고,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고, 용서를 빌면서 관계를 맺어가며 이야기가 생기는 거 아니겠나. 그런 삶이 버겁지만 그만큼 감사함이 커졌다.
Q 제작발표회에서 '매달려서라도 하고 싶은 작품'이라고 했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A 다사다난하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이런 인생을 사는 역할을 맡는 게 쉽지 않다. 어떻게 보면 엄마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한 편의 일대기 같은 영순의 서사가 펼쳐지는 거 아니냐. 그 안에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작품을 언제 해보겠나. 이제 나이를 생각해보면 제가 어느 정도 주변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다. 매력있고,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만나기 쉽지 않으니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하고 해야 한다.
Q 눈물 흘리는 장면이 많고, 또 투병을 하는 설정이라 외적 혹은 내적으로 준비한 부분은
A 아무래도 제 관리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웃음) 다들 입금이 되면 조절해가며 마르시던데 저는 그게 안되더라. 지방 촬영이 많고 하다 보니 제가 같이 밥 먹고 그런 걸 좋아해서 잘 안됐다. 너무 눈물이 많아서 신파 같고, 혹시 그런 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제가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우울의 빈도를 줄였다. 눈물 장면이 너무 많아서 시청자들이 보다 지칠 거 같더라. 그래서 오히려 감정을 틀어 막으면서 연기했던 게 많았던 거 같다. 대본의 흐름에 얹어져 있다 보면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눈물이 나게 만드는 게, 조금 더 힘을 받았던 거 같다.
A 강호 역이 사실 너무 어렵다. 완벽한 타이틀롤도 아니라 배우들 섭외나 캐스팅이 좀 힘들었을 거다. 웬만큼 잘 알려진 배우들은 또 그 캐릭터에 잘 안 맞더라. 도현 배우의 연기 폭이 정말 넓다. 제가 전작을 거의 다 보기도 했는데 실제로 촬영을 해보니 훨씬 더 잘될 수밖에 없는 배우다. 중간에 '더 글로리'가 방송돼서 난리가 났다. 빨리 캐스팅하고 계약하기 잘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웃음) 왜 이 작품에 들어왔냐고 물어보니까 '지금 아니면 하지 못할 거 같았다. 도전하고 싶었다'고 했다더라. 그렇게 교감을 주고 받는 배우가 많지 않은데 그게 다 돼서 저는 너무 신났다. 다른 뭔가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있으면 되니까 좋았다. 낯은 좀 가리는데 가만히 안 놔두니까 금방 깨졌다. (웃음) 입양 동의 장면을 찍을 때는 강호(이도현)가 눈물이 계속 나서 몇 번을 다시 갔다. 감정 조절이 안되니까 강호도 울고, 나도 울고…. 어쩔 수 없었다.
Q 실제 라미란은 아들에게 어떤 '엄마'인지도 궁금하다
A 저는 방치형이다. 아들이 4살부터 (네 삶은) 너의 선택과 책임이라고 했던 거 같다. 자기가 알아서 하고 있고, 저도 딱히 간섭을 안 한다. 저 살기가 바빠서 애한테 신경을 못 썼다. 이거에 미안한 엄마들이 꽤 있던데 저는 안 미안해 했으면 좋겠다. 엄마도 본인의 삶이 있는 거니까, 젖 먹이는 걸로 끝났다고 본다. 오은영 선생님처럼 키우려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저도 막 사는데 애를 어떻게…. 식구들이 제 드라마에도 관심이 없고, 그냥 뭘하든 관심이 없다. (웃음) 제가 집에 잘 안 오기도 하고. '나쁜엄마'도 주변에서 하도 이야기를 들어서 '봐야 되나' 하던데 아마 안볼 거 같다. 내가 어떤 엄마인지 판단해서 그런 엄마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식들 관점에서 좋으면 좋은 엄마고, 나쁘면 나쁜 엄마인 거다. 아들한테 물어봤는데 '좋은 엄마'라니까 '오케이'하고 끝났다.
Q '나쁜엄마'가 본인의 연기 인생에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
A 10년 마다 한번씩 오래 남을 작품을 가져가게 되는 거 같다. 이것도 그 중에 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찍는 동안 행복했고, 찍고 나서 보면서도 행복했다. 그러면 그게 최고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하고, 또 더욱 올라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