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PD의 연출 방식은 그야말로 '존중' 그 자체다. 연출자이기에 욕심이 날 법한 소재에서도 자제하고, 결말에서조차 스스로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것에 어떤 평가가 나올지라도 드라마를 존재하게 하는 작가의 의도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아직 현장이 익숙하지 않은 젊은 배우들과 작업할 때도 김 PD는 충분히 기다릴 줄 알았다. 엄정화의 따뜻한 인간성을 목도하고 그것을 가장 화면에 잘 담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부족한 점에 대한 인정은 명쾌하다. 크론병 논란이 대표적이다. 기술적으로 수정과 삭제가 어려운 부분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 의뭉스러움을 남기지 않는다. 자신이 떠난 친정 MBC에 대해서도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비단 MBC 뿐만 아니라 글로벌 OTT들과 경쟁하는 레거시 미디어 전부가 해당하겠지만 김 PD는 불편한 주제일지라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뚜렷한 의견을 전했다. 그 역시 미디어 산업의 한 구성원으로서 깊은 고민과 생각의 지점이 있었다.
'닥터 차정숙'이 10개국 1위를 하며 넷플릭스에서 기록한 호성적 역시 연출자로서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다. 글로벌 스타들의 억대 출연료가 '보통'인 시대에 충분히 적은 제작비로도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변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무조건 대작, 무조건 스타가 아니라 다른 길을 모색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닥터 차정숙'을 통속극 같지 않은 주말드라마로 탄생시킨 김 PD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다음은 김대진 PD와의 일문일답.
A 시작하면서도 다들 긴가민가하면서 (잘 될 거라고) 예상을 못했다. 배우들이 너무 행복해 한다. 첫 주에 '모범택시2' 마지막회랑 같이 나갔는데도 5%대가 나와서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알고 싶다' JMS 특집도 잘 넘어갔다. 현재 한국에서 시즌3까지 가는 드라마 잘 없는데 '낭만닥터 김사부3'과 붙었을 때도 잘 나와서 모두 다 놀랐다. 올 초에 제일 많이 들은 게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연진아'인데 이제 '정숙이'가 됐다. 물론 마지막회가 20% 넘었으면 좋았을 거고, 아쉬웠지만 배우 개개인이 다 보여져서 행복했다. 시청률은 숫자이지만 그 이상의 동력이 된 것 같다.
Q 연출자로서 파악한 '닥터 차정숙'의 흥행 비결은?
A 한번 보면 무슨 내용인지 머리에 들어오는 쉽고 편한 드라마다. 가족 이야기, 키다리 아저씨, 불륜 코드까지 세계 모든 작품들에서 흥행이 검증된 코드들로 구성돼있다. 그걸 그대로 가면 클리셰이자 연속극이 될 뿐이지만 작가님은 현명하게 한끝씩 다르게 갔다. 거기서 생명력이 생기는 거고, 배우들이 그걸 잘 알아서 넘어갔다. 어떤 식이냐면 시청자들이 바라는 현실과 판타지가 있는데 제작진이 판타지를 어느 정도 실현시키다가 막판에는 개연성에 맞는 현실로 가줘야 한다. 앞에 펼쳐 놓은 걸 감정적으로 풀어야 하니까 전부 사이다로 갈 순 없는 거다. 그 구간을 어떻게 갈 건지 고민한 끝에 정숙이가 배를 타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 각 인물들이 자기의 삶을 실현하는 엔딩이 나왔다.
Q 불륜 코드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완급조절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A 애초에 불륜에 방점을 두지 않았다. 차정숙(엄정화 분)가 가진 수많은 장애물 중 하나인데 '최종 보스' 느낌? 사실 왜 모르겠나. 어느 정도까지 이 코드를 밀어붙여 극성을 높이면 시청률이 알아서 따라온다. 하지만 작가님도 그렇게 갈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부부의 세계'를 넘어설 수는 없을 거 아니냐. (웃음) 이 작품은 스스로 힘으로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이고, 불편한 소재를 불편하지 않게 가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전에 불륜 관련 이야기를 더 하지 않은 것도 있다. 김병철 배우(차정숙 남편 서인호 역)가 조절을 잘해줬다. 코드 자체가 파괴력이 강해서 조금만 나와도 크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애를 많이 썼다.
A 로이의 성장은 뭐냐고 생각해보면 부모를 찾는 과정에서 정숙에게 마음을 열고, 아마 가족의 마음을 느꼈을 거라고 상상했다. 이런 사람이 내 옆에 있으면 삶이 따뜻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인 거다. 작가님은 '정숙이랑 연애를 할 것도 아닌데 로이도 좋은 여자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의도였다. 제가 펄펄 뛰고, 당사자인 로이도 '이거(이런 결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냐'는 의견이었는데 작가님은 '현실적으로 남자가 30살이 넘어서 아줌마만 바라보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하시더라. 판타지인데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 뭐가 어렵나 생각도 했는데 그냥 짧게만 나오고 얼른 전환하는 정도로 갔다. 말로는 그랬어도 로이가 워낙 다정한 스타일이라 막상 현장에서는 잘하더라. (웃음)
Q 크론병 표현 관련해서 논란도 있었다. 현재까지도 관련 장면이 수정·삭제는 안된 상태다
A (논란이 생긴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런 얘기가 나온 의도 자체는 드라마 흐름 상 장인어른이 화가 폭발해서 아무 말이나 던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대사가 대본상 나오는 것일뿐 실제 크론병과는 다르다는 오류를 표시하는 장치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마련을 못했기에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다. 올린 사과문에는 당연히 제 마음도 들어가 있다. 다만 이미 방송이 나간 부분에 대해 수정, 삭제하는 건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넷플릭스를 들어갔다는 건데, 미국 법률 계약으로 얽혀 있는 거라 고칠 수가 없다. 넷플릭스가 원래 러닝타임이 흐트러지는 거에 민감해서 조율이 난감한 거 같다. 넷플릭스도 이제 한국에 적응해서 보완을 해나가야 되겠지만 워낙 '슈퍼갑'이라…. (웃음) 아마 넷플릭스 공급 전이라면 여지가 있지만 공급이 된 이상 빼와서 무엇을 하기가 어려운 문제더라.
Q 크론병과는 조금 다른 결이지만 배우 유아인, 김새론 등 최근 사회적 물의를 빚은 연예인의 출연 분량을 두고 제작사들도 고민이 깊다. 작품의 완성도와 비판적 여론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맞을까
A 대한민국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애정이 깊은 만큼 몰입도 강하다. 예전 같았으면 대충 넘어갈 일도 이제는 의식이 발전해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 오히려 드라마를 사랑하기에 잘못된 건 냉정하게 판단하더라. 물론,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괴롭다. 모르는 상태에서 일들이 터지는데 일정 부분은 책임을 져야 되는 거니까. 일반인 출연이 많아지는 예능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점검하고 걸러내도 안되고, '참거짓'과 상관없이 일단 논란이 도배해버리면 내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자본과 노동력이 들어간 거니까 억울하고, 거기 참여한 모든 스태프들의 인생이 나빠질 수도 있다. 아마 지금 유아인, 김새론이 출연한 작품의 제작진도 많이 고민할 거다. 욕을 먹으면 작품 자체에 거부감이 생기고, 빼자니 작품 완성도가 떨어지고. 이에 대해서는 시청자들이 조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사 하는 건 저희 바람인거고, 제작진들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나. 머리를 짜내서 괜찮은 배우를 캐스팅 해야 될 거다. 조금씩만 서로 양보하고 노력하면 좋겠다.
A 넷플릭스 순위가 높은 게 명예는 있을 지라도 일단 JTBC 쪽과 통화를 했을 때는 아직 마이너스인 걸로 안다. 공급 계약을 할 때 작품마다 수익 비율을 정하는데 '닥터 차정숙'의 경우엔 해외에 팔리는 배우가 없고 그런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낮게 계산한 듯하다. 결과를 놓고 보니 해외 바이어들도 '글로벌로 먹히는 젊은 아이돌이나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 중점으로 비즈니스를 했는데 이와 무관한 배우들로도 10개국 1등하는 걸 보니 생각을 바꿔봐야겠다'는 입장이더라. 그게 기분이 좋다. 언제까지 젊은 남자배우를 붙들기 위해서 만만치 않은 출연료를 감당할거냐. '닥터 차정숙'은 비록 글로벌 스타는 아니지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애써 모았더니 연기 구멍이 없었다. 대작 드라마는 대작으로 가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이런 드라마도 많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닥터 차정숙'은 가성비도 높고,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도 훌륭했던 드라마다.
Q 원래 MBC 출신인 것으로 안다. 엄정화가 같은 MBC 출신 김태호 PD의 예능에 나가는 모습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겠다
A 물론 엄정화 누나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인 건 알고 있지만 첫 화를 봤는데 어색하더라. 누나가 저와 김태호 PD의 모교인 고려대 축제를 갔다. 김태호 PD가 MBC 후배이기도 하지만 대학교 1년 후배이기도 하다. 공교롭게 정화 누나가 고려대 출신 감독 두 명이라 일을 하고 있단 생각과 함께 우리 학교에 가줘서 너무 고맙다고 생각했다. 영상을 찾아봤는데 누나가 '나 누군지 알아'라고 물어보니까 '차정숙'이라고 외치는데 내 눈이 다 글썽글썽해졌다. 차정숙을 응원했던 마음과 겹쳐져 더 그랬던 거 같다. 내가 대학생 때 최고의 가수였던 엄정화와 같이 작업을 했단 게 또 한 번 느낌이 이상했다. 그 후에 누나에게 '연기와 음악을 동시에 하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사람이고, 누나 같은 사람이 오래 있어야 용기 내서 다들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Q '닥터 차정숙'이 MBC로 들어왔지만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최근 MBC, KBS 등 레거시 미디어 드라마들이 침체에 빠져 있는데
A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왜 우린 저걸 못했지' 생각할 수 있다. MBC에서 '닥터 차정숙'이 안됐던 이유를 저는 들었다. 감당 못할 제작비는 아니었지만 지상파가 갖는 한계점이 분명히 있다. 거대 조직이라 결정 구조 자체가 각 단계마다 굉장히 복잡하다. 상대적으로 젊은 JTBC나 CJ ENM과 다르게 결정자들이 나이가 드신 분들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젊은 그룹들과 미디어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런 관점이 TV를 안 보는 세대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어 더 혼란스러울 거다. SBS가 선전하고 있고, 지상파 출신 감독들도 훌륭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MBC와 KBS에 안타까움이 있다. 왜 우리는 MBC를 나와서 일할 수밖에 없었나.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나와서 일을 하는 거다. 저 역시 MBC에 있을 때 받은 설움도 있지만 그래도 제 친정이다. 언젠가는 좋은 작품을 가지고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