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보고 싶구나" 老 교장의 타임캡슐 개봉 대작전

20년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 교장·교사·학생들, 타임캡슐 묻어
2000년대 이후 인천 첫 학교 타임캡슐 개봉식
다음 달 15일 개봉 앞두고 '난관'…"축제일 줄 알았는데 냉랭"
"과거의 나와 만남, 새 시작 될 수 있어…지금 모습에 주눅 들지 말길"

이명수(76)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 교장이 13일 인천 미추홀구 자택에서 자신이 재직하던 2004~2005년 선학초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보며 타임캡슐을 묻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주영민 기자

"20년이면 아이가 청년이 되고, 장년도 노년이 되는 시간이죠.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다시 한번 미래를 꿈꾸자는 취지로 타임캡슐을 묻었는데 이걸 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13일 인천 미추홀구 자택에서 만난 이명수(76)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 교장은 다음 달 예정된 타임캡슐 개봉식 준비 과정을 얘기하는 내내 자주 한숨을 쉬었다. 마을 축제가 될 줄 알았는데 '강 건너 불구경 하는 듯한' 주변의 냉랭한 태도에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20년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 교장·교사·학생들, 타임캡슐 묻어


이씨는 다음 달 19일 오후 3시 자신이 근무하던 인천 연수구 선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타임캡슐 개봉식을 준비하고 있다. 앞서 선학초등학교는 장맛비가 내리던 2003년 7월 19일 방학식 날 학생 1983명과 교직원 70명의 꿈이 담긴 타임캡슐을 교정에 묻었다.
 
지름 70㎝, 높이 1m짜리 플라스틱 통 4개에 나눠 담긴 이 타임캡슐에는 '20년 뒤 나에게 쓰는 편지'와 일기, 가족사진, 당시 가장 아끼던 물건 등이 담겼다.
 
당시 이씨가 이 행사를 제안할 때는 3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당시의 교직원들이 20년간 건강한 삶을 살자고 다짐을 하자는 의미였고, 둘째는 어린이들에게 장래희망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미래상과 지금 묻은 물품이 20년 뒤 얼마나 희소가치가 있을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 셋째는 행사에 참석한 어린이들과 교직원들이 다시 만나는 장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서로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2천여명의 교사와 학생들이 타임캡슐 증서도 나눠 가졌다.
 
행사를 제안한 이씨는 황금거북과 가시오가피 담금주 5ℓ를 타임캡슐에 넣었다. 당시 56세로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이씨는 자신이 2023년까지 건강하게 지낼 거라고 자신할 수 없어 장수의 의미를 담은 거북을 넣었다고 한다. 또 금붙이를 넣어야 교사와 학생들도 좀 더 진지하게 물품을 선정할 것이라고 여겨 황금거북을 넣었지만 사실 싸구려 모조품이었다. 가시오가피주는 20년 뒤 성인이 된 제자들과 옛 동료가 20년간 숙성된 맛있는 술을 나눠 마시며 과거와 미래를 얘기하고 싶어서 넣었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은 자신의 장래희망과 관련된 물품을 많이 넣었는데 야구공과 축구공이 많았다고 한다. '4강 신화'를 쓴 2002 한-일 월드컵 직후여서 남학생들 사이에서 축구 인기가 높았다. 이 밖에도 1원·10원·500원짜리 동전, 1만원권 지폐, 감명 깊게 읽은 책, 귀고리, 목걸이, 휴대전화 등을 넣은 어린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2003년 당시 인천 선학초등학교가 학생과 교사들에게 나눠준 타임캡슐 증서. 해당 증서는 이명수 전 교장이 받은 증서. 이명수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장 제공


2000년대 이후 인천 첫 학교 타임캡슐 개봉식


당시 선학초등학교의 타임캡슐 봉안은 지역신문에도 여러 차례 보도될 만큼 관심이 높았다. 인천의 학교에서 타임캡슐을 봉인한 사례는 단 3개에 불과하다. 첫 봉인 사례는 1959년 경인교육대학 부설초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사범학교 부속 초등학교'가 '정초식(머릿돌을 세우는 행사)'을 기념해 머릿돌 안에 당시 학생과 교직원 명단, 단체사진, 건물 설계도, 당시 통용되던 1환·5환·50환·100환·1천환 등 지폐 6장 등이 담긴 구리상자를 넣은 것이었다. 이 구리상자는 47년 뒤인 2006년 학교 신축 이전 과정에서 발견된 이후 현재 학교 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두 번째는 2003년 이씨가 다니던 선학초등학교 전교생과 교사 등 2053개의 물품을 담은 것이고, 세 번째가 2006년 미추홀구 인주중학교 1회·2회·3회 입학생과 교사들이 타임캡슐을 묻은 사례다. 인주중학교 타임캡슐은 2036년 개봉할 예정이다.
 
20년이 지나는 동안 이씨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여러 차례 인천 초등학교 교장단 회장을 지냈고, 학부모를 위한 교육서도 펴냈다. 은퇴한 뒤에는 '한국 체험활동 교육연구소'를 차려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방법들을 연구하며 '인천 교육계 원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한때 아들의 사업을 돕기 위해 필리핀에서 수년 간 지내며 제2의 도약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빠르게 확산하고 장기화되면서 모든 사업을 접고 국내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2003년 7월 19일 인천 선학초등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타임캡슐을 묻기 전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 속 정장을 입은 사람이 이명수 전 선학초등학교 교장. 이명수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장 제공

다음 달 15일 개봉 앞두고 '난관'…"축제일 줄 알았는데 냉랭"


이씨는 개봉식 날 많은 제자들이 올 수 있도록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직접 만든 광고지를 들고 선학초 인근 유치원과 중학교, 교회와 성당 등을 찾아다니며, 연락이 닿는 졸업생들에게 개봉식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씨의 소식을 들은 인천 연수구의회 한성민 의원이 자신의 SNS계정에 선학초등학교 타임캡슐 개봉식 행사를 알리는 글을 올리는 등 응원도 이어지고 있다.
 
개봉식을 주도할 만한 졸업생이 있다면 일이 더 수월하겠지만 이마저도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2003년 당시 전교생이 2천명에 육박하던 학교는 이제 600명 안팎으로 줄은 반면 다문화 가정 자녀는 대폭 늘었다. 20년간 많은 가정과 학생들이 떠났고, 학교의 성격도 달라졌다. 어렵사리 졸업생과 연락이 닿아 행사 취지를 알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내 연락처 어떻게 알았어요?"였다.
 
장소를 빌려줘야 할 선학초등학교의 분위기도 냉랭하다. 졸업생들의 타임캡슐 개봉식을 반길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귀찮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운동장 뒤처리를 약속하지 않으면 개봉식 자체를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비를 들여 타임캡슐을 꺼낼 포크레인 업체도 구하는 등 하나둘 준비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옛 동료들도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씨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20년 사이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며 "그만큼 각박해진 게 아닌가"라고 한탄했다.


인천 연수구의회 한성민 의원이 자신의 SNS에 올린 인천 선학초등학교 타임캡슐 개봉식 알림 글. 한성민 의원 SNS 캡처
 

"과거의 나와 만남, 새 시작 될 수 있어…지금 모습에 주눅 들지 말길"


개봉식을 준비하면서 졸업생이 많이 올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선다. 1991년~1996년생인 졸업생들이 현재 사회초년생인 20대 중반~30대 초반이어서 평일 오후에 모교를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씨는 "타임캡슐 개봉식에 시간과 비용이 들겠지만 부담을 갖는 것보다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는 지역행사나 축제 정도로 생각하고 찾아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어렵게 개봉식을 찾아올 제자들에게 "혹여 20년 전 자신이 그렸던 미래와 현실이 다르더라도 그 모습에 주눅들지 않길 바란다"며 "과거의 나와 만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날 꼭 만나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명수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장이 제작한 '타임캡슐 개봉식' 안내 전단지. 이명수 전 인천 선학초등학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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