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함께 경력단절의 길로 들어선 차정숙은 끊어졌던 의사의 길을 처음부터 다시 잇는다. 남편의 충격적인 불륜이나 뜻대로 되지 않는 자녀들은 차정숙 서사의 일부 요소일지언정 중심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 결말도 누군가를 벌하거나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정숙 스스로 한 뼘 자라나게 된다. 참지 않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무너진 자신을 세워나가는 차정숙이야말로 어찌 보면 진짜 승리자가 아닐까.
실제 삶의 궤적을 그려보면 엄정화와 차정숙은 대척점에서 출발해 만난다. 쉬지 않고 자기 일에 매진하며 이를 통해 보다 성장하고, 때론 슬럼프를 맞아도 흔들림 없이 직진하는 점이 그렇다. 결혼이든 직장이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갈 때만이 행복할 수 있고, 엄정화에겐 그것이 무대와 연기다. 지치지 않는 비결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20대부터 해왔던 자신의 일을 지금도 너무 사랑해서다.
누군가는 '닥터 차정숙'을 답답한 삶을 바꾸고 싶은 중년 여성들의 판타지라고 할지 모른다. 일견 맞는 말이다. 다만 엄정화에게 차정숙처럼 치열한 나날들은 모두 현실이고, 앞으로도 현실일 예정이다. 하루가 다르게 트렌드가 바뀌는 연예계에서 엄정화는 변치 않는 에너지로 살아남았다. '포스트 엄정화'를 꿈꾸는 여자 가수 후배들이 그가 보여준 가능성, 그 이상의 것을 증명한다.
다음은 가수 겸 배우 엄정화와의 일문일답.
A 정숙이가 20년 동안 주부로 살다가 다시 자리를 찾는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많은 분들이 가정 이루고 아이 키우고 살면서 경력이 단절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며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됐던 것 같다. 또 일단 긍정적이면서 따뜻한 캐릭터라 좋았다. 시청자들이 정숙이를 응원하면서 따라올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다. 정숙이가 부정적 감정이 커져도 분노나 독기가 들어가지 않게 조절을 많이 했다. 너무 과하지도, 독하지도 않게.
Q 얼마 전 고려대 축제 무대에서 '차정숙'이란 연호가 나오더라. 가수 엄정화를 겪지 않은 세대라 더감회가 남달랐을 듯하고 '닥터 차정숙'의 인기를 실감했겠다
A 그게 너무 반갑고 기쁜 포인트다. 함성을 질러주시는데 '차정숙!'이라고 하는 거다. (대학생들도) '차정숙을 봤단 말이야?' 싶었다. 남녀노소 다 봐주시는 느낌이었다. 모든 세대 이야기가 다 들어가서 각각의 입장, 그리고 정숙이가 앞으로 어떻게 해쳐나갈지 그런 이야기를 따라가 주신 것 같다. 앞으로의 제 시간도 기대가 되면서 이 기분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힘이 됐다. 오랜만에 이런 기쁨을 느끼니까 든든함이 생기는 거 같다. 너무 사랑을 받아 행복하니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 주가 기다려졌다.
Q '엄정화 언니가 한다고 해서 출연했다'고 명세빈이 그러던데 극 중에서는 대립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어떤 호흡이었나
A 아무래도 저희 사이에 유대감이 생겼다. 세빈이도 90년대부터 배우로 시작했고, 연차가 엄청 된 배우들이라 서로 공감할 부분이 너무 많다. 이 작품을 세빈이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싶어하는지 느꼈고, 모든 배우들을 다 따로 만나서 캐릭터 분석을 하고 그랬다. 전화해서 내게도 대본 리딩 한 번 해줄 수 있냐고 하더라. 그런 열정으로 승희 캐릭터가 잘 표현이 된 거 같다.
A 어쨌든 해프닝이 있어서 임신을 하게 됐고 결혼을 해서 살고 있지 않나. 무조건 인호와 승희가 잘못을 한 거다. 거기서 만나서 아기를 만들면 안되는 거였다. 누구 한 사람은 이러면 안된다고 나와야지. (웃음) 결론은 인호가 나쁜 놈이라면서 우리 셋이 앉아서 '왜 그랬니' 이렇게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병철씨가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긴 했는데 시청자들이 화를 내면서도 공감하면서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게 연기하더라. 오히려 재미있는 요소가 됐다.
Q 최근 여성 주인공의 성장 서사를 그리는 작품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차정숙은 어떤 점에서 새로웠다고 생각하는지
A (여자 배우) 선배님들도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셔도 다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을 꾸준히 하고 계신다. 그런 면에서 엄청 힘을 받는 거 같다. 그 중에서 차정숙은 성격 자체가 따뜻해서 좋았다. 지금 쉽게 화도 내고, 흥분도 하고, 모든 걸 표현하고 그런 시대라고도 한다. 사람들 마음도 많이 힘들고, 그런 모습을 그린 작품도 많다. 그 안에서 정숙이가 가지고 있는 깨끗한 진심이 너무 좋았다. 대본을 보고 연기하면서 항상 생각했을 때 정숙이가 내뱉는 말은 다 진심이고 위로이고, 응원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런 감정신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서 했던 거 같다.
Q 한 뼘 성장한 캐릭터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는 결말이었다. 마음에 흡족했는지, 또 정숙은 크게 복수하지 않았지만 실제 엄정화였다면 어땠을지도 궁금하다
A 전 '얄짤' 없다. 제 심정으로는 로이 킴(민우혁 분)하고 가고 싶다. (웃음) 하지만 정숙이 선택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을 하든 응원하고 싶다. '닥터 차정숙'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나 스스로'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 같다. 누구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 스스로 내가 온전히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참고 인내하며 사는 게 아니라 오롯이 내가 시작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여성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고, 인간 판타지다. 막막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응원 같다. 다른 사람에게 찾지 말고 스스로 찾는 게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묻고 있다.
A 효리가 '언제 이혼하냐, 젊은 로이 만나라'고 했다. 자기는 끝났으니까 대리만족이고 언니라도 젊은 남자친구를 만들든, 연애를 하라더라. (웃음) 김태호 PD님도 매주 너무 재밌다고, '닥터 차정숙'의 좋은 기운이 '유랑단'에도 올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두 프로그램이 뭔가 겹쳐져서 제가 항상 음반과 배우 활동을 병행했던 시절과 맞아가는 느낌이다. 뭔가 재미있고 새로운 시기다. 체력적으로는 둘이 촬영이 겹치지 않아 힘들진 않다. 다만 '이젠 정말 너를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다'며 깊이 넣어뒀던 무대 소품을 또 꺼내면서 그런 감성에 젖을 때가 있다.
Q 벌써 데뷔 30주년을 지났다. 트렌드나 감각에 뒤처지지 않고 이렇게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가수 엄정화의 음반 활동을 기다리는 후배나 팬들도 많을 것 같다
A 준비해서 올해 앨범을 냈으면 좋았을 거 같단 생각이 든다. (웃음) 후배들도 '언니, 앨범 언제 내세요' 물어본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쁘다. 제가 너무 이 일을 사랑하니까 시도하는건데 후배들이 기뻐하고 많이 의지를 하니까 의미가 있는 거 같다. ('롱런' 비결이라면) 친구들을 잘 둔 것 같다. 저는 항상 모든 걸 열어두고, 많이 보면서 흡수하려고 한다. 요즘 친구들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후배들 만나면 공유도 하고, 서로 나눈다. 그런 감각을 열어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요즘 좋아하는 걸 같이 가져가려고 노력한다. 그게 불편하지 않다.
A 제가 이게 너무 좋다. 결혼보다 일이 좋은 거 같다. 연기도 무대도, 제가 너무 사랑해서 지치지 않게 된다. 제가 20대, 30대에는 결혼하고 나서 무대에 올라가는 건 있을 수가 없었다. 댄스 가수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왕성하게 활동을 했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온 거 같다. 물론 슬럼프도 있었다. 데뷔 초에도 몇 번 왔었고, 최근에도 연기적으로 갈증이 날 시기에 '닥터 차정숙'을 선택했다. 점점 (역할의) 폭이 좁아지고, 기회가 적어지고, 나이가 주는 부담감이 있고 그랬던 거 같다.
Q 어려운 시기도 있었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경력을 쌓아 온 미혼 여성으로서, 2030 후배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과거에 결혼 관련된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한 적 있는데 여전히 '비혼'을 추천하나
A 비혼 추천까지는 아니다. (웃음) 제가 생각했을 때 결혼은 정말 선택이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결혼이다. 예전에는 특정 나이 안에 무조건 결혼을 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실제로 제가 젊을 때는 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요즘 세대 친구들도 그런 부분이 고민이긴 하더라. 나이 때문에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내가 원해서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결혼이 아닐까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 정해 놓은 타이밍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인생의 타이밍에 결혼을 해서 살면 된다. 나는 일보다 좋은 사람을 못 만났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