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근무' 이미 일상…아동병원 70% "야간·휴일 진료 줄일 것"

대한아동병원협회는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드래곤시티 호텔에서 '달빛어린이병원제도 폐지 및 어린이 진료시스템 정상화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은지 기자

"저희가 야간진료를 예전에도 안했던 게 아니에요. 10년 전에도, 지금도 하고 있어요. 전체적인 소아과 전문의 숫자가 줄고 있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자격을 따고도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원장님들이 (많이) 계세요. 처음 이 전공을 맘먹었을 땐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좋았는데…현실은 그렇지 않았단 거죠. (병원) 경영을 할 수 있는 유인책을 만들어 준다면 달빛어린이병원 없이도 다 야간진료 할 수 있어요." (대한아동병원협회 이홍준 정책이사) 
 
"(평일)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진료 보고, 주말도 한 번도 쉬지 않고 오후 5시까지 (진료)해요. 그런데 저희 병원, 달빛어린이병원 아니에요. 그걸 하려면 밤 10~11시를 넘겨야 하는데, 전국에 있는 상당수 (달빛어린이)병원은 '1주일에 한 번' 그렇게 돌아가는 게 현실이에요. 전형적인 전시 행정입니다." (소청과 전문의 이모씨)
 
국내 첫 어린이전문병원이자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달빛어린이병원'인 서울 용산구 소화병원이 이달부터 의사 부족으로 휴일 진료를 중단한 가운데 적잖은 아동병원들은 "추가근무는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라고 입을 모았다. 

야간·휴일에 외래 진료를 하고 가산 수가를 받는 달빛어린이병원이 아니더라도, 과로를 자처하며 '번아웃'을 겪는 소아과 의사들이 태반이라는 의미다.
 
대한아동병원협회(협회장 박양동)는 지난 9일 서울 용산구 드래곤시티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달빛어린이병원 제도 폐지 △어린이 진료시스템 정상화를 촉구하며 이같이 밝혔다. 

협회는 "앞서 소청과의사회의 폐과 선언 이후 정부에서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그 짧은 사이 현실은 저희를 옥죄어 왔다"고 말했다.
 
박양동 아동병원협회장은 "제도 미비로 2010년 대구 장중첩증 여아가 사망한 사고 이후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불행한 사고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부족한 소아진료 인력은 충원되어지지 않고 정부는 '하드웨어'를 확대하는 정책에만 집중하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날 협회는 전국 120여 곳의 아동병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도 공개했다. 60여 곳이 설문에 응한 이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아동병원당 평균 근무 의사는 5명으로 집계됐다. 이들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78시간으로 "전공의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게 협회의 진단이다.
 
이홍준 정책이사는 전국의 달빛어린이병원을 100곳으로 확충하겠다고 발표한 정부의 대책을 두고 "(주) 78시간 일하는 사람에게 90시간을 일하라고 몰아세우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인력 유입이 없는 상태에서 남아있는 의사들을 쥐어짜는 방식으로는 필수의료의 핵심인 소아 진료 시스템을 재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아동병원협회는 9일 기자회견에 앞서 "사회적 정책 미비로 인해 사망한 어린 영혼들을 위한 묵념"을 진행했다. 이은지 기자

평일 야간진료는 밤 9시까지 환자를 본다는 병원이 32%로 가장 많았고, '오후 7시까지' 20%, '오후 6시까지'와 '오후 11시까지'가 각각 16%로 나타났다. 밤 9~11시까지 환자를 받는 아동병원이 과반(53%)에 달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평일 마감시간에 해당하는 오후 6시까지 진료를 한다는 병원이 '3곳 중 1곳 이상(35%)'이었다. 낮 1시까지 환자를 받는다는 응답도 30%에 근접했다(토 28%·일 26%).

휴일 진료도 오후 1시(40%)나 6시(34%)까지 이뤄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평일 야간이나 휴일에 근무하는 의사 수는 '4~5명(47.20%)'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2~3명'이 38.90%로 파악됐다.
 
아동병원 대부분은 이같은 야간·휴일 진료를 이어가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응답한 병원 10곳 중 7곳 이상(71.4%)은 향후 평일 야간·휴일 진료시간 감축 여부에 대해 "(줄일)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예상 축소 시점으로는 '3~5개월 이내(45.20%)'를 가장 많이 꼽았고, '2~3개월 이내(27.80%)'가 뒤를 이었다. 병원들은 진료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는 이유로 △진료의사 수 감소(34.20%) △근무직원 이탈(32.90%) △응급중증 환자 전원 어려움(24.10%) 등을 들었다.
 
실제로 올해 들어 의사나 간호사 이직자가 '(전혀) 없다'고 답한 병원은 각각 13.90%, 0%에 그쳤다. '의사초빙 난이도'를 묻는 질문에는 90%의 병원이 "매우 어렵다" 했다. 소청과의 만성화된 인력난을 알 수 있는 지표다.
 
문제는 정부가 연이어 내놓는 대책에도 상황이 개선될 기미는 없다는 점이다. 협회는 "요즘 아동병원의 진료 현장은 아비규환"이라며 "환아 보호자들은 수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2시간 이상 대기'에 의료진과 직원들에게 욕설과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협회가 파악한 아동병원 의사 평균연령 분포에 따르면, 40대(39%)와 50대(26%)가 대부분인 반면 30대 소청과 전문의는 22%에 불과하다. 강은식 부회장(대전 봉키병원장)은 "정부 정책이 지금과 같이 나간다면 향후 10년간 소청과 전공의 배출은 거의 어렵다고 봐야 한다"며 "사람을 구하고 싶어도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막는 식이라 1·2차 의료의 붕괴 시점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권역별 거점 의료기관 중심으로 소아 중증환자를 수용케 한 정부의 정책도 '과밀화'를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전국적으로 10곳이 가동되고 있는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가 경증환자 포화상태라는 증언도 나왔다.
 
대구 칠곡경북대병원 소아응급의료센터에서 근무 중인 조병욱 진료교수는 "예전에 비해 (응급실) 접근성은 좋아져 한두 시간 내 도달 가능하지만, 전체 지자체의 모든 환자가 한 군데로 쏠리고 있다"며 "평일에 제가 24시간 근무를 한다고 하면 보는 환자가 60~80명, 공휴일에는 120~160명까지도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필수의료가 무너지면서 아이들이 갈 응급실이 없어지자 경증환자들이 1·2차 의료기관이 아니라 중증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소아응급의료센터를 이용하고 있다"며 "지난주엔 34개월 된 남아가 (단순) 발열로 저희 병원 응급실을 내원했다. 아동병원에 접수하려 했더니 대기시간만 3시간이라 진료를 빨리 하려는 목적에서 119에 전화했다 하더라"고 전했다. 이로 인해 응급의료 대상인 소아 중증환자가 잘못되더라도, 사전에 거를 장치가 없다는 지적이다.
 
그는 "환자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경증·중증을 나누는 건 매우 어렵다. 차라리 119 구급대원들에게 면책특권을 주고, 생체징후 이상이 없다면 해당 환자를 상급종합병원으로 이송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제언했다. 비응급 소아환자들의 응급실 내원 자제를 요청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협회는 전국 시·군·구마다 소아인구 비례에 따라 1·2·3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전달체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발적으로 야간·휴일 진료에 임하고 있는 아동병원들에 대해서는 달빛어린이병원을 대체토록 해야 한다고 봤다.
 
이와 함께 △의료사고 관련 환자·의료진을 동시에 보호하는 면책 특례법 제정 △소아건강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어린이건강기본법 제정 △아동병원과 분만병원의 의료법상 법적 지위 부여 △입원 전담의-정규직 교수 간 임금격차 해소 등도 제시했다.
 
아울러 국무총리 산하에 범부처 차원의 대응이 가능한 '소아필수의료 살리기 특별위원회'를 시급히 구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 회장은 "사명감이나 애정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버티던 이전 세대들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간단한 해결책이 아니라 매우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박양동 대한아동병원협회장(창원 서울아동병원 병원장)이 9일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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