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2011년 일이다.
그 뒤 1인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2019, 조기현) 중에서-
이른바 MZ 세대인 조기현 작가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젊다(young)는 수식보다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돌봄자(Carer)로서의 정체성이다. 장애나 질병·중독 등의 문제를 가진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을 이르는 영 케어러는 또래들이 학업과 취업 전선에서 '1인분의 삶'을 바삐 준비할 때 가까운 타인의 일상까지 2~3인분의 짐을 짊어지고 산다.
올해로 12년째 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조 작가는 갓 스물이 된 초여름의 어느 날을 잊지 못한다.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행복나눔재단(SK그룹의 사회공헌재단)에서 열린 '영 케어러와 돌봄의 위기' 컨퍼런스 연사로 나선 조 작가는 "'○○○님 아드님이시죠? 여기 응급실입니다'란 전화를 받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버지를 마주했다"고 돌이켰다.
부모님의 이혼 후 한부모가정에서 자란 조 작가 외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 강의 촬영, 쇼핑몰 시설 관리, 건설현장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던 그는 '상상도 해본 적 없'던 막막한 현실에 내몰렸다.
"사람이 아프고, (제가) 보호자가 되면 무슨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막 어려운 설명을 듣고 서류에 사인도 해야 하고, 복지신청을 대신하려면 서류도 떼고 신청도 해야 하고…전혀 모르고 마주하는 상황 속에서 사실 어디에든 물어보고 싶잖아요, 사람이란 게. 그런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도움을 청할 곳도 마땅치 않았던 거 같아요."
처음에는 '이 힘든 몇 개월만 참으면'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버텼다. 기대와 달리 퇴원 후 아버지의 상황은 더 악화됐다. 사회활동에 곤란을 겪던 아버지의 실직에 따라, 조 작가는 갑자기 '가장'이 됐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병원비를 보며 "돈이 없으면 얼마나 삶이 위험한지 경험한" 그는 끊임없이 일했다. 통장 잔고가 좀 모였다 싶어 '뭘 좀 배워볼까' 궁리하면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와 병원을 오가는 일이 반복됐다.
혹자들은 '왜 복지 신청을 진즉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당연히 매순간 찾아가고 신청했"던 당사자 입장에선 다소 허탈한 질문이다. 조 작가는 "어머니와 아주 소액의 금전거래가 있었는데 '(이혼을) 위장한 것 같다', '왜 가족이 아닌데 계속 돈 거래를 하냐'며 (지원을) 거절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돈을 모아야겠단 생각에 공장 등 저임금이어도 꾸준히 나가면 소득이 보장되는 아르바이트를 했더니, '2인 가구 소득(기준)이 넘어간다'며 신청이 반려되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보내던 하루가 감당할 수 없이 버거워진 건 아버지의 치매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집에만 계시던 아버지는 돌연 새벽에 '일 나가야 된다'며 안 하던 행동을 하더니, 돌림노래처럼 이를 반복했다. 진단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조 작가는 가족 돌봄과 생계, 진로 등 '3중의 짐'이 자신을 옥죄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학업·직장 등 스스로 놓아야 했던 이들…모임으로 돌봄경험 '재발견'
숨구멍이 되어준 건 9년간의 간병·돌봄을 기록한 책(<아빠의 아빠가 됐다>)이었다. "그 전까지는 엄청나게 압도적인 이 경험을 한 번도 외부에 이야기한 적이 없더라고요. 저 혼자 판단하고, 저 혼자 참고, 저 혼자 해결하려 했던 거죠." 또래들에겐 자신이 겪는 일이 일부의 생소한 경험으로 여겨질 것 같아 입을 떼기 쉽지 않았다. 조 작가는 "저조차도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풍부하지 않았다"며 "고립감과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어쩌다 사정을 알게 된 어른들은 조 작가의 등을 두드리며 '효자'라고 대견해했다. 하지만 조 작가는 칭찬으로 통용되는 그 말이 불편했단다. "내가 이걸 오롯이 (혼자) 감당하라는 건가,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가족으로서 내가 다 책임지는 거 말고 다른 길은 없나"란 고민이었다. 자녀의 돌봄 부담을 당연시하지 않는, 다른 사회적 호명이 절실했다.
신기하게도 '나부터 좀 솔직해져 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내자, 도처에서 "나도 영 케어러(였)다"는 고백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한 연락이 쏟아졌다. 조 작가는 "돌봄을 하면 사실 부끄러운 순간이 아주 많다. 죄책감과 모멸감도 많이 느낀다. 내가 실수한 것도 나만 알지 않나"라며 "굉장히 저를 괴롭혀온 기억들을 솔직히 털어놔야 '가족이 아프고 가족을 돌본다는 사실'이 약점처럼 보이는 사회에서 (자기)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밝혔다.
자조모임을 통해 만난 청년들은 모두 자신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조손가정에서 성장해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지만 할머니의 치매가 깊어지면서 장기간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던 푸른(가명), 반 년 간의 직업훈련 끝에 어렵게 입사한 직장에 출근한 첫날 '아버지 폐에 물이 차 중환자실로 이동한다'는 연락을 받은 경민, 조현병을 앓는 어머니를 돌보던 중 불시에 찾아온 할머니의 낙상과 인지저하로 학부를 자퇴한 은영… .
영 케어러라 하면 보통 청년기에 접어든 성인을 떠올리지만 훨씬 어린 친구들도 많다. 조 작가는 엄마가 말기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인 '중학생'의 이야기도 전했다. 채무 상환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종일 밖에서 일하는 아빠 대신 엄마 약을 챙기고 다리의 붓기를 빼드리거나 동생 밥을 챙겨주는 것도 모두 희준군의 몫이다. 집에선 묵묵히 할 일을 하다가도 학교만 가면 '나는 왜 얘들처럼 못 살지' 하는 생각에 우울감이 심해졌다고 했다.
비슷한 무게를 안고 사는 영 케어러들이 모이고 나누는 자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대목이다. 실제로 조 작가는 현재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을 운영 중이다. "자조모임을 하는데 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좀비 영화에서 생존자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 여기만 오면 내가 어떤 상황이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이들은 짧은 문장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시(詩)로 써보고, 서비스·정책 중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점들을 토론하기도 한다.
모임은 단순한 동병상련(同病相憐)에 그치지 않고, 그간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던 돌봄의 '밝은 면'을 바라보게 해준다는 게 조 작가의 설명이다. 한 참여자는 '내가 한 돌봄 경험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쓸모가 있다고 느꼈다'고 말해줬다. 조 작가는 "돌봄은 당연히 어렵고 내가 피해를 보기도 하고, 슬프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이면에) 기쁨과 보람, 상실한 만큼의 배움이 있었다는 것도 하나하나 발견하게 된다. '정신 승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생계지원 外 진로 이행 등 뒷받침돼야…"긴밀한 민관협력 필수"
지난 2020년 '간병 살인' 사건 이후 영 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높아졌으나, 정책적 대응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처음으로 실시한 만 13~34세 가족돌봄청(소)년 실태조사 결과를 지난달 발표했다. 이들은 보통 주당 21.6시간, 평균 46.1개월을 가족 돌봄에 쏟고 있었다. 미래 계획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은 37%, 우울감 유병률은 일반 청년(약 8%)에 비해 7배 높은 61%에 달했다.
대상자들이 가장 원한 지원 항목은 '생계 지원(75.6%)'과 '의료 지원(74.0%)'이었지만, 조 작가는 좀 더 디테일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 작가는 "영 케어러 입장에서 생계·의료·주거, 이 세 가지가 해결되면 힘들지 않은가, 하면 그건 아니다"라며 "돌봄에 시간을 많이 쓰니 일을 못하고 미래에 안정적 소득도 얻지 못하게 된다. '돌봄 자체에 어떻게 집중할 수 있느냐'를 중심에 두고 경제적 어려움을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조 작가가 내내 품어온 질문('어떻게 하면 아픈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서, 또 아버지의 삶을 관리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과 같은 맥락이다.
현장에서 영 케어러 지원을 고민해온 박재형 광주 서구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사무국장은 기존의 복지시스템이 이들의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설계됐다고 지적했다.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사업'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일부 지자체가 가족돌봄청년 지원책을 속속 내놓는 가운데 광주 서구도 현재 관련 조례에 대한 의회 심의가 진행 중이다. 박 사무국장이 직접 발품을 팔며 도움을 요청한 결과, 청소년상담복지센터 등 10개 기관이 업무협약(MOU)을 맺었고 3년간의 사업비도 확보한 상태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조직된 이후에도 지원사업은 5개월 간 난항을 겪었다. 막상 사례자를 찾으려고 보니 담당자들조차도 '영 케어러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초기엔 '노부모를 부양하는 청(소)년'으로 대상을 한정했다가 지금은 '돌봄부담을 가진 청(소)년'으로 범위를 확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돌봄의 대상과 상황이 너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박 사무국장은 "장기요양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40·50대 가족을 돌보는 영 케어러들은 누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주거 기준선을 약간 넘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도움을 못 받는다고 했을 때 이들의 부담은 어땠을까"라고 되물었다. 이어 "영 케어러들을 위한 사회적 돌봄체계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돌봄과 생계, 진로가 함께 지원될 수 있는 패키지를 구성하고 지원체계를 다변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연성이란 강점을 십분 활용해 민간이 정부에 먼저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민관 협력'이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박정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본부장은 "어떤 약국에 늘 같은 아이가 약을 타러 온다고 가정하면, 영 케어러 관련 기준을 안내하고 발굴하는 체계도 필요하다"며 "당사자의 목소리가 실효성 있는 정책이 될 수 있도록 촉구하는 것도 민간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남 일' 아닌데 저평가된 돌봄…인증서 등 온전한 가치 인정해야
영 케어러 실태조사를 담당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함선유 부연구위원은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학교 교사들도 지원학생 중 영 케어러가 있는지를 잘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해당 청소년·청년이 스스로 내 상황을 인식할 수 있도록 대중적 교육을 교내 과정으로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한 육아기 단축근로제 등과 비슷하게 영 케어러의 특수성을 고려한 근로방식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함 부연구위원은 "영 케어러도 워킹맘처럼 급하게 돌봄수요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고, (반대로)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게 되면 돌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작가는 서울 성동구처럼 '돌봄 경력'을 공식 인증서로 발급하고, 이를 기업에서 인정해주는 형태의 고용 확대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가족돌봄에 쓴 시간과 노력을 채용과정에서 일종의 자격으로 평가해보자는 취지다.
패널들은 영 케어러의 돌봄이 특정한 몇 사람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강조했다. 저출산·고령화의 가속화, 비혼·만혼과 1인가구 증가 등이 맞물리며 모두가 언젠가는 직면하게 될 과제란 뜻이다.
조 작가는 '빙산의 일각'을 형상화한 그림을 보여주며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이 돌봄이란 영역은 훨씬 거대하고,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며 "이러한 돌봄이 계속 감춰지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 여성들이 무급으로 수행하는 노동으로 여긴 것이 (사회가) 돌봄을 저평가한 맥락"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저평가하고, 저평가하고, 저평가하다가 (이윽고) 더 이상 수행할 여성들이 없어질 때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지는 사례가 영 케어러 같기도 하다"며 "우리가 이 문제 해결을 논의할 때 돌봄의 가치를 어떻게 재평가하고 사회가 인정하느냐를 절대 빼놓아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