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처음으로 해외 패션 고가품 브랜드 구찌(Gucci)에게 경복궁의 대표 상징이 된 근정전 앞마당과 행각(行閣·궁궐 등의 정당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을 런웨이로 내줬다. 조선 역사에서 국가의식을 거행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근정전 일대에서 패션 행사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1년 서울시 주관 서울패션위크가 5대 고궁(경복궁·덕수궁·경희궁·창덕궁·운현궁)에서 일부 진행됐지만 패션필름 제작을 위해 잠시 열렸을 뿐, 대중이 참석하는 자리로 마련되거나 특정 브랜드가 단독으로 열린 적은 없었다.
그마저도 서울의 역동적인 600년 역사를 시대별로 보여주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프로보크 서울(proboke Seoul) 같은 근현대 건축물, DDP 등과 함께 역사와 문화의 발전상을 통해 대한민국 패션 브랜드의 가치를 세계에 전달한다는 당위성이 받아들여진 행사의 한 코너였다.
명품이라는 '구찌 패션쇼'에 바빠진 문화재청
당초 구찌는 지난해 11월 경복궁에서 '구찌 코스모고니'(Gucci Cosmogonie) 컬렉션의 패션쇼를 선보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해 8월 청와대에서 촬영된 패션 화보가 문제가 되자 문화재청은 부라부랴 취소를 결정했다가 열흘 만에 이를 뒤집었다. 다시 경복궁 구찌 패션쇼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구찌도 행사 예정 보도자료를 냈다.자문기구인 문화재위원회는 당시 '관계 전문가 조언을 받아 경복궁이라는 역사문화유산의 가치를 강화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 확실히 고증받을 것' 등 조건을 붙여 가결했다. 이태원 참사 여파로 그해 11월 예정됐던 구찌 패션쇼는 열리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달 16일 '구찌 2024 크루즈 패션쇼'가 화려한 막을 올렸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산하 궁능문화재분과는 지난 2월 회의를 열어 "작년 11월 1일 장소 사용 허가를 받았으나, 이태원 참사로 인해 중단돼 재추진하는 행사"라며 "소위원회를 구성해 (패션쇼 행사를) 추진하라"고 결정했다.
항간에는 작년부터 추진해온 구찌 패션쇼가 패션과 문화 분야에 열정이 많은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의 '관심 사안'이라는 말이 돌았다. 지난 3월 김 여사가 일본 대표 건축가로 꼽히는 안도 다다오와 만나는 자리에 '케어링(KERING)'이라 인쇄된 책자가 놓여 있어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블룸버그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을 견제하기 위한 행사"
구찌는 여러 차례 패션쇼 계획이 무산됐음에도 왜 경복궁을 그토록 원했던 걸까.블룸버그는 17일 '구찌, 서울 궁에서 패션쇼로 한국의 부유층을 유혹하다'라는 제목을 기사를 통해 한국이 전 세계 구찌 매출의 9%를 차지(모건스탠리 조사)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한국의 높아진 문화적 위상을 활용하기 위해 서울에서 공들여 패션쇼를 개최했다고 분석했다.
매체는 앞서 지난해 4월 루이비통, 5월 디올이 각각 서울 한강 잠수교와 이화여대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다며 아시아 시장에서 중요해진 서울에서 경쟁 브랜드인 에르메스와 루이비통을 견제하기 위한 행사였다고 평가했다.
경복궁은 세계에서도 유례 없는 600년 조선왕조의 역사가 숨쉬는 법궁이다.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자 선진국 대열에 선 한국의 우월성을,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인정해 준 경이로운 행사라고 찬사를 보내고 뿌듯해해야 하는 걸까.
사회학자인 탠시 E. 호스킨스는 그의 저서 '런웨이 위의 자본주의'를 통해 패션을 문화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대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산업이며 명품(고가품) 산업은 빈부격차가 극심한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고가품 패션 산업이 일부 부유층 고객에게 판매되는 제품보다 '대중 시장' 제품(그렇다 해도 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판매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샤넬의 매출 절반 이상이 향수와 화장품 판매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높은 이윤을 유지하는 데에 대중의 소비가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브랜드를 달고 출시되는 선글라스의 소매가는 개당 수백 파운드에 이르지만, 실은 몇 그램의 플라스틱과 유리가 명품이라는 허울 좋은 환상을 걸쳤을 뿐인, 공기처럼 가볍고 하찮은 것들이라고 비판한다.
과시적 욕망 자극하는 명품 산업의 민낯…랜드마크 마케팅
명품 브랜드들이 세계적인 랜드마크에서 패션쇼를 해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화 된 패션의 힘이 이러한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미디어와 정부기관을 설득해 자신들에게 주어질 매출의 결실로서, 문화적 유산과 연결고리를 강화하려 한다는 점이다. 반대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치가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기대심리가 작동한다.패션 산업계에서 익숙한 비판이 노동착취, 환경파괴, 성·인종 차별이다. 저개발 국가의 자원으로 개발도상국의 저임금 노동착취, 수없이 버려지는 패션 폐품과 가죽 착취로 인한 환경 파괴,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빈부격차와 차별에 노출된 패션 산업의 과시적 욕망의 본질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숨긴다.
산업혁명은 인류의 발전을 획기적으로 진보시켰지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를 박제시켰다. 기술과 진보가 만나고, 문화가 성장하고, 강대국의 격전장이 되는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에서 유례 없는 급속한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늘은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가 일군 패션 산업의 어두운 그림자와 다름 아니다.
문화재의 관리, 보호, 지정, 복원 등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립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외청이며 우리가 모두 함께 보호하고 누려야 할 문화재에 대해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문화재청이 오늘날 자본화되고 산업화된 명품 브랜드에게 고고한 역사의 품위를 가진 고궁을 내줘서는 안 된다는 비토가 아니다.
구찌 패션쇼가 끝난 뒤 경복궁과 근정전을 멀리리 내려다 볼 수 있는 인근 빌딩에서 열린 애프터 파티. 자정 넘어서까지 현란한 조명과 강렬한 비트의 음악, 그리고 비싼 술과 음식들, 명품으로 치장한 초대받은 자들만이 누리는 고고한 문화적 우위를 표방한 패션쇼의 뒷풀이는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보며 전 세계인이 호응한 역설적 배설을 마주한 것과 다름없다.
명품 회사들이 '짝퉁'은 포기해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브랜드의 훼손이다. 문화재청이 우리 브랜드의 가치를 지킬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