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왜 우리를 공동묘지로? 무덤과 동거, 짓밟힌 인권 ②땅 준다며 내쫓더니…반세기 가까이 나몰라라 ③'밀어붙이기식 화전정리', 행정도 '우왕좌왕' ④'화전정리사업'의 빛과 그림자, 우려가 현실로 ⑤사과와 치유를 위하여, 정치권·법조계의 시각은? |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사업이기도 한 '화전정리사업'. 산림황폐화를 막고 산림녹화에 기여한 치적 사업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주 화전민의 절반 가량이 지원을 호소하는 등 생계 어려움에 맞닥뜨린 것으로 당시 산림청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산림청이 1980년 발간한 화전정리사.
화전정리사업의 성패는 이주 이전 화전민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화전정리사업이 1978년 단 시일 내에 마무리돼 임정사(林政史)에 길이 남을 빛나는 업적이라는 자체 평가도 있다.
산림청이 전국 화전가구를 상대로 한 전수 조사(1976년 3월)에서 27만 7126가구의 5%만이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주 화전민 9864 가구를 떼어 놓고 살펴보면 성공적이라는 평가에 의문 부호가 붙는다.
이주화전민의 42.3%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전북의 경우 공동묘지로 내쫓긴 김제 금산사 뒤 옛 금동마을 주민을 포함해 화전정리법에 따라 이주 또는 이전 대상에 포함된 가구가 544가구에 이른다.
이들 전북지역 이주 화전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조사에 응한 391가구 가운데 195가구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설문 당시 절반 가량인 49.8%가 생계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전민으로 몰려 공동묘지로 쫓겨난 김창수(78)씨도 가족을 부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등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김씨는 한동안 끼니 해결하기도 쉽지 않았다.
전북지역 화전민 집단 이주촌 가운데 한 곳인 김제 모악동에 거주하고 있는 홍학기(93)씨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당시 막노동을 전전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에서 이주한 한 화전민은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것을 보다 못한 자녀들에 의해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당시 지역 언론도 이주 화전민의 생계 대책을 우려하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잇따라 내보냈다.
화전정리법에는 화전경작지를 이주할 때에는 주택건축과 농경지 확보 비용 등을 보조 또는 융자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지만 이를 제대로 이행했는지 의문이 이는 대목이다.
1976년 농가 평균 연간 소득은 115만 6천 원(통계청,1995년)
당시 이주화전민에 대해서는 연간 농가 소득의 34.6% 그친 40만 원~50만 원의 보상비만 주어졌다.
이주보상비가 충분치 못하다는 지적은 1976년 11월 국회 내무위원회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도 거론됐다.
당시 국회 내무위 소속 장동식 의원은 "40만 원의 이주 보상비로 어떻게 정착할 수 있냐?"며 "산림청이 아닌 정부 차원의 정착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전민속 연구가인 세명대 이창식 교수(미디어문화학)는 "이주 화전민의 상당수가 품팔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창식 교수는 "보상비도 충분하지 않았고 일부에게 일굴 땅이 주어지기도 했지만 8~10명의 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결국 품팔이에 나서는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예산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의욕이 앞선 화전정리사업, 이주 화전민의 절반 가량이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1976년 당시 김제군 금동마을이 통째로 헐리고 공동 묘지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은 현재도 화전정리사업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