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50여 차례에 걸쳐 발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씨가 이를 사실상 지시했던 책임자라고 강조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사실상 마지막 '대국민 보고회'를 열고 5.18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최소 20곳 이상에서 50여 차례에 걸쳐 발포했다고 밝혔다.
이는 광주·전남 지역의 계엄군 진압 작전을 재구성하고 총상에 의한 사망자와 부상자를 지도상에 표기해 분석한 결과로,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구체적인 총격 횟수가 권위 있는 조사를 거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위에 따르면 계엄군의 첫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쯤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됐다. 20일 오후 11시쯤 광주역 인근에서 발포가 이어졌고, 21일에는 11공수여단과 7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도청 일원뿐만 아니라 3공수여단이 배치된 전남대 일원에서도 총격이 일어났다.
병원 진료 기록과 보상심의 서류를 분석한 결과, 총상에 의한 사망자는 총 135명이고 총상에 의한 부상자는 최소 300명이 넘었다.
총격 등 계염군의 폭력적인 진압에 따른 사망자는 166명이었다. 이 가운데 14세 이하가 8명, 장애인과 60세 이상은 5명이었다. 진료기록과 보상심의서류로 분석이 가능한 상해 피해는 2617명으로 조사됐다.
우발적인 총격이 아닌 의도적인 발포였다는 점도 재확인됐다. 조사위는 "5월 21일 오후 1시쯤 시위대의 화염병 투척 및 장갑차 돌진 후 이뤄진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전에 이미 일부 병력에 실탄이 분배되었다는 사실을 현장에 있던 계엄군의 진술과 현장 사진 등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특히 장갑차 기관총 사수로부터 장갑차 기관총에도 하루 전인 5월 20일부터 실탄이 장착돼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당시 대대장의 체험수기와 1995년 검찰 진술, 그리고 현장 취재기자들의 증언을 통해 도청 앞 집단 발포 상황에서 공수부대가 흩어져 횡대로 '앉아 쏴'와 '서서 쏴' 자세로 동시에 여러 곳에서 사격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계엄사령부의 책임을 명확히 꼬집었다. 조사위는 "5월 20일 광주역 발포, 5월 21일 도청 앞 발포에 따른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군 현장 지휘관은 물론 계엄사령부도 발포 현장을 엄격히 통제하지 않았다"며 "그에 따라 총상 피해자는 더욱 늘어났다"고 덧붙였다.
조사위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책임을 확실히 밝히겠다는 입장 또한 내놓았다. 조사위는 발포 지휘계통과 연관된 중요인물 70여 명을 조사한 결과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발포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며, 첨단 조사기법을 동원해 책임 소재를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박모씨는 "발포 명령은 문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전두환의 지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발포는 보안사 계통에서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김모 대령 또한 "10·26 이후 이희성은 실권이 없는 사람이었고, 참모차장 황영시가 광주 진압작전의 실질적 사령관이었는데 황영시를 움직인 사람은 전두환 사령관"이라고 조사위에 진술했다.
조사위는 2018년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2019년 12월 26일 시행됨에 따라 만들어졌다.
위원회 조사는 오는 12월 26일에 종료되며, 위원회는 내년 6월 종합보고서를 채택해 대정부 권고안을 제시한다.
위원회는 계엄군에 의한 발포 경위와 책임 소재 및 헬기 사격 의혹 규명, 민간인 사망과 상해 및 성폭력·민간인 집단학살·행방불명 및 암매장 의혹 등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과 은폐 등 특별법 제3조에서 정한 11개의 법정 조사범위에 따라 총 21개의 직권조사 과제를 수행해왔다. 피해자 신청에 의한 216건의 신청 사건도 동시에 조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