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취재 '항상 늦는' 韓언론…"알권리 위해 여권법 적용 바꿔야"

호스토멜 국제공항 전투 현장 보도. CNN 방송 화면 캡처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 러시아군은 수도 키이우 인근 호스토멜 국제공항에 공수군(VDV)을 시작으로, 공항을 통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수도를 점령하는 방법으로 이른바 '특별 군사 작전'을 속전속결로 끝내고자 했다. 탈환과 재탈환이 이어지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러시아군은 호스토멜 공항과 키이우 점령에 실패했다. 미국 CNN 기자들은 개전 초반의 긴박한 상황을 바로 이 전투 현장에 직접 서서 전 세계에 타전했다.

불행히도 한국 언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2022년 2월 13일 0시부터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된 우크라이나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위난상황 시 특정 국가에 방문이나 체류를 금지할 수 있는 여권법 17조를 적용함에 있어 매우 엄격하다. 지난 2007년, 여행금지 바로 전 단계인 여행제한국가로 지정됐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샘물교회 피랍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호스토멜 근처에 사는 초등학생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가 전쟁 초기부터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공습경보나 포격이 끝나도 지하 창고에서 나오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르는 모습을 촬영한 김상훈 작가의 사진. 김형준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3월 18일 KBS와 SBS가 여권법 시행령 29조 '공익을 위한 취재나 보도를 위한 경우 예외적 여권 사용을 허가할 수 있다'에 따라 허가를 받아 우크라이나에 들어갔다. 외교부는 4월에는 르비우를 비롯한 서부 4개 주, 5월에는 키이우까지 중서부 11개 주에 대해 취재를 위한 입국을 언론에 허가했다.

그나마도 4월에는 5일·6명 이내였고 5월에는 2주·20명 이내라는, 현장취재엔 턱없이 부족한 조건이었다. 취재가 가능한 장소도 러시아와 가까워 실제 격전이 벌어지던 남부 헤르손과 동부 하르키우,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 등은 제외됐다. 시점 또한 개전 직전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상황과 최전방의 전황을 취재하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김상훈 사진작가. 김형준 기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홍콩 등 전 세계 분쟁지역을 돌아다녔던 김상훈 사진작가는 올해 초 1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우크라이나에 다녀왔다. 1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그의 사진전 '우크라이나 1년, 금지된 현장을 가다' 개막식에선 이같은 현실에 대한 성토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김 작가는 취재노트에서 "취재와 보도 또한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받는 데만 최소 2주에서 한 달이 걸리고 취재 기간은 15일 이내로 제한한다"며 "명분은 국민의 안전이다"고 했다. 전쟁터 특성상 프리랜서 기자들도 흔한데, 한국 프리랜서 언론인들은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를 받기조차 어렵다. 그 허가를 받으려면 '언론사에 소속된 직원'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게 김 작가의 설명이다. 실제로 외교부의 언론 대상 공지에도 이같은 점이 명시되어 있다.

김형준 기자

때문에 김 작가도 이번에 국제뉴스 전문 매체 '다큐앤드뉴스코리아'와 함께 취재를 했다. 20년 넘게 동티모르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등 전 세계 전쟁터를 돌아다녔던 김영미 PD가 이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지난해 4월 18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여권법으로 한국 기자들은 들어갈 수가 없고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그것도 전혀 뉴스 현장과는 관계없는, 저 밑에 시골 같은 데 가라고 한다"며 "뉴스 가치가 없어서 거기에는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한 바 있다.

김형준 기자

김 PD는 현장에서 취재진과 만나 "정말 기자들의 안전이 궁금하다면 (외교부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며 "취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뭔가를 '취재해도 되느냐'고 정부에 허가를 받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국경에서 아예 쫓겨난 경험도 많지만 그럴 줄 알면서도 현장에 갔다. 대한민국 언론이 최선을 다한다는 발자취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라며 "현장이 위험하다지만, 외국 기자들도 (다 알면서) 그 위험한 곳에 모인다"고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기자들이 현장에서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자 노력하지만, 이러한 여권법 적용의 현실 때문에 한국 언론만 그러지 못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열린 '금지된 현장' 사진전에 참가한 언론인들이 낸 성명서. 김형준 기자

그를 비롯한 분쟁 취재 언론인들은 지난해 세계 분쟁지역 사진전 '금지된 현장'에서 낸 성명서를 통해 "천재지변, 전쟁, 내란, 폭동, 테러 등은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그 어떤 국제뉴스보다 신속·정확하게, 그리고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취재와 보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행 규정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하고, 가장 중요한 시점에 현장에 있어야 할 기자가 현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모든 상황이 끝나 버리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명서는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현장에서 위험과 책무를 동시에 감수하고 수행해야 하듯이, 전장을 취재하는 언론인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보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정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 민주항쟁을 취재·보도한 독일 기자나 한국전쟁을 기록한 미국 종군기자의 업적은 소중한 사료로 높이 평가하면서, 국내 기자의 국제 분쟁 취재·보도는 안전상의 이유로 제한하고 있다. 외신기자의 입국을 제한했다면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나"라고도 강조하고 있다.

호스토멜 근처에 사는 초등학생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가 전쟁 전에는 구슬과 레고 등을 모으다가, 전쟁 발발 이후 전쟁의 흔적인 파편 등 쇠붙이를 모으는 모습을 촬영한 김상훈 작가의 사진. 김형준 기자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은 "우크라이나에 관심과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선 제대로 된 정보가 필요하다"며 "이 사진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저 미사일이 몇 발 날아오고 건물이 폭파됐고 탱크가 몇 대 부숴졌다 등 외신들이 전하는 전쟁 상황에 대한 정보만 알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군인 부부가 기차역에서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촬영한 김상훈 작가의 사진. 김형준 기자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는 "전쟁이 터진 직후부터 우리 국민들은 CNN과 BBC, NYT처럼 서방 언론들이 보도하는 내용을 받아 (한국 언론이) 요약해 전달받았다"며 "언론사들의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여권법의 제약이 너무 엄격하다 보니 자유로운 취재 활동을 하기 힘들다. 언론·방송인들과 사진작가들은 전쟁의 현장을 생생히 보도해서 우리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고 했다.

그는 "정부에서는 우리 국민 보호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테고, 그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지만 취재를 하기 위해 들어가는 언론·방송인과 사진작가들에 대해선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며 "리스크(위험)가 있는 것을 알면서 그것까지 감수하고 들어가고자 할 때는 이를 수용하고 관대한 정책으로 변경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지금보다 자유롭게 취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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