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은 관객이 '볼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떠났던 관객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엔데믹에 접어들며 다시 돌아올 것이라 조심스레 예상했으나, 여전히 '위기설'이 이어지고 있다.
예상보다 길어진 코로나19 팬데믹은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가 급성장을 이루며 주류 플랫폼으로 거듭나며 관객들의 시청 행태에도 변화가 생겼다. 여기에 팬데믹 기간 3천 원으로 급격히 인상된 관람료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다 신중하게 선택하게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가성비와 관객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충족시킬 콘텐츠의 '부재'다.
손익분기점은커녕 100만 넘기도 힘든 한국 영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코픽)가 발간한 '2022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영화산업 주요 부문 매출 합은 1조 7064억 원으로 2021년보다 66.7% 증가했다. 또한 지난해 한국 영화 관객 수는 6279만 명으로 2021년보다 무려 244.7% 늘었다. 물론 최고 수준이었던 2019년과 비교하면 완전한 회복을 말하기엔 이르지만, 2022년에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천만 영화 '범죄도시 2'까지 나오면서 희망을 맛봤다.
그러나 '범죄도시 2' 이후 천만 영화는커녕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여름 성수기에 쏟아진 대작 '외계+인 1부' '비상선언'은 물론 겨울 극장가를 노린 '영웅', 2023년 새해 포문을 연 대작 '교섭' '유령' 등의 흥행 부진으로 인해 '위기설'이 다시 대두됐다. 170억 원이 투입된 '교섭'(손익분기점 약 350만 명)은 200만 명도 넘지 못하고 내려갔다.
특히 '탑건: 매버릭' '아바타: 물의 길' 등 외화에 자리를 넘겨준 데 이어 올 3월에 이르러서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등 일본 애니메이션 등 외화의 강세로 한국 영화 점유율은 팬데믹 기간이던 2020~2022년을 제외하면 2004년 이후 3월 가운데서 가장 낮은 수치인 25.1%를 기록했다.
이후 올해 4월 개봉한 한국 영화 '리바운드' '킬링 로맨스' '드림' 등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으며, 이 중 100만 관객은 돌파한 건 '드림'이 유일하다. 이처럼 가장 큰 문제는 지난해 11월 '올빼미' 이후 손익분기점을 넘은 한국 영화가 없다는 점이다.
손익분기점은커녕 100만 관객조차 넘기 힘든 상황에서 라인업 발표는 엄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다. 개봉을 기다리며 쌓여 있는 영화만 100여 편에 달하지만, 대부분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다 보니 개봉일을 잡는 데도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한 영화계 홍보 관계자는 "예전엔 100만 단위로 홍보 자료를 냈는데 요즘은 10만 단위로 내야 한다"며 달라진 현실에 관해 토로했다. 그러면서 "흥행을 가늠하기 어려워 영화 개봉일을 잡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OTT 강세·높아진 티켓값에 무너지는 영화계
한국 영화의 흥행 부진은 자연스럽게 극장 위기와 산업 전체의 위기로 이어진다. 당장 일부 외화들로 관객들을 불러 모을 수는 있겠지만, 한국 영화의 거듭된 흥행 실패로 몇 년째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들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투자·배급사는 물론 감독들과 배우들 역시 잘나가는 OTT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한국 영화 점유율이 사상 최저를 달성한 3월을 두고 코픽은 "영화관 관람요금 상승으로 관객의 선택이 신중해진 것과 영화 제작 인력의 OTT 진출이 가속화 하면서 경쟁력이 약화한 것이 한국 영화 부진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당장 묵혀 놓은 영화가 개봉한다 해도 2~3년 후 극장에 걸릴 영화가 사라질 수 있다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났다.
흥행 부진과 제작 편수 감소 등 악순환이 벌어지는 원인으로 OTT의 강세가 주요인으로 꼽힌다. 팬데믹 기간 동안 급성장한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들의 공세가 이어졌고, 팬데믹 기간 티켓값은 3천원이 인상됐다. '홀드백'(한 편의 영화가 다른 수익 과정으로 중심을 이동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까지 단축되자 관객들은 극장 대신 OTT라는 대체제로 향했다.
한국영화감독조합(DGK) 공동대표인 윤제균 감독은 11일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예전에는 영화와 TV 크게 두 개 정도 플랫폼이 존재했다면 요즘은 채널도 엄청나게 많이 늘어난 것은 물론 OTT, 유튜브, 각종 숏폼 등 영화 대체할 수 있는 대체재가 너무나 많이 늘어났다"며 "특히 영화 관람료가 많이 올랐다. 그것도 결국 시장의 변화 중 하나"라고 짚었다.
이어 "빨리 보기와 요약본의 등장으로 젊은 층 중심으로 시청 행태도 변화했다. 이에 익숙해져 있어서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보는 행태를 힘들어하는 거 같다"며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은 물론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예전만큼 극장에 꼭 가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 같다"고 설명했다.
거듭된 영화의 부진은 극장까지 타격을 주고 있다. 당장 일부 외화로 관객들이 극장을 찾지만 한국 영화가 살아나지 않는 한 결국 극장의 침체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재현 CJ CGV 전략지원담당은 "투자-제작-배급-상영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구조인데 개봉한 영화가 이익을 못 보고, 개봉 대기 중인 작품은 개봉 확정을 못하고, 투자·제작을 판단할 수 있는 투자사들이 시나리오 검토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붕괴된 영화 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개봉지원금 지급 등 물꼬를 터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관람료 상승만 문제일까…韓 영화 시험대 올라
영화계 위기를 두고 OTT의 존재와 함께 높아진 관람료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영화인들도 있다. 일부 관객뿐 아니라 영화인들 역시 관람료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4월 코픽 홈페이지 국민제안에는 "영화 관람료를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인하해 달라. 멸망 위기의 한국 영화계를 되살리기 위해선 영화 관람료가 인하되어야 한다"는 글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범죄도시 2' '탑건: 매버릭' '아바타: 물의 길' 등의 흥행에 비춰본다면 관람료만이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관객들 사이에서도 비싼 값을 지불해서라도 '볼 만한' 영화가 없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TV는 물론 OTT에서 수백 편의 콘텐츠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만큼 콘텐츠의 '질'에 대한 경쟁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큰 기대를 모은 대작을 비롯한 개봉작들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이후 개봉작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
실제로 지난해 '범죄도시 2'가 코로나 시대 첫 천만 영화 기록을 쓰자 영화계에서는 "좋은 콘텐츠가 있으면 극장으로 간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라며 무너진 생태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그러나 이후 나온 영화들, 특히 여름 성수기 대작들이 이러한 기세를 이어 나가지 못하면서 관객들이 불만이 높아졌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안일하게 비슷한 장르의 영화, 비슷한 배우를 써서 반복 재생산했던 영화가 지금까지 계속 개봉하고 있다"며 "관객들은 몇 년 사이 OTT 등을 통해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콘텐츠를 보면서 눈높이가 높아졌는데, 한국 영화가 거기에 맞추지 못하고 있다. 외화의 흥행 상황을 본다면 보고 싶은 영화를 못 만들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팬데믹 시기 괜찮은 작가와 감독, 시나리오가 다 OTT로 가며 투자할 만한 작품이 없어진 게 문제"라며 "OTT로 갔던 우수한 인력이 다시 극장 영화 쪽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윤제균 감독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인이 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며 "콘텐츠로 위기를 이길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극장에 와서 보고 싶은, 극장에서 볼 수밖에 없는 그런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